맛있어 보이는 녀석 "뭐라고?" "오빠아아앙~~~" 애교스런 콧소리를 내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여동생 마르타를 보며 체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평상시에는 사랑스런 여동생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마다않고 들어주었던 체이스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어림없었다. "안돼!" 단호하게 잘라 말하고 체이스는 다시 책장으로 눈을 돌렸다. 부탁도 웬만한 부탁이라야 들어줄 마음이 생기는 거지 이건 당최 말이 돼지 않는 부탁인 것이다. 그래서 체이스는 애초부터 싹 무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잠시 후..... "흑흑.....흑..."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가는 울음소리가 체이스의 신경을 긁었다. 체이스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무시하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 울음소리가 끊이지도 않고 십분여동안 계속되자 마침내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질러버렸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 순간 마르타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생긋 웃으며 체이스의 팔에 매달렸다. "고마워용. 오빠아" 이 때만큼 여동생의 미소가 가증스럽다고 느껴진 적이 없는 체이스였다. 사이가 좋기로 유명한 마세르다 가의 남매인 체이스와 마르타는 지금 해괴한 짓을 하고 있었다. "자 오빠. 좀 더 숨을 들이쉬어. 얼른" "큭!!! 마르타. 차라리 난 죽여라." "아이이잉~ 날 위해서 조금만 참으란 말야." 하얗게 된 손을 부들부들 떨며 체이스는 마르타가 꽉 졸라매는 코르셋(그렇다! 코르셋!)의 고통을 견뎌내고 있었다. 왜 남자인 체이스가 이런 해괴망측한 일을 당하고 있느냐...... 원인은 동생인 마르타에게 있었다. 마르타의 오랜 짝사랑이자 이웃 영지의 영주인 오렌경의 친구, 가데스 클라리드 경이 오렌경을 보기 위해 옆 영지로 온다는 것이 아닌가. 오렌경은 오랜 친우의 대접에 손색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성에 있던 시녀들 외에 추가로 시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다. 이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마르타가 아니었다. 귀족집의(그것도 영주의 외동딸) 딸인지라 차마 직접 나서서 고백은 못하고 오랜 세월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오래간만에 그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해서 마르타는 시녀를 가장해서라도 이웃 영지로 갈 생각이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마르타는 곱게 자란 귀족의 딸다운 조신하고 얌전한 면은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는 저돌적인 성격의 처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마르타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아버지인 마세르다 영주가 마르타에게 수도로 가서 왕의 처형인 마르타의 고모를 친견하고 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번 초청은 왕께서 직접 하신 일이라 피할 수도 없었다. 명목상이야 오랫동안 못 본 조카를 보기 위함이라지만 사실상은 마르타의 신랑감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체이스가 아닌 마르타를 부르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무너질 열일곱 처녀가 아니었다. 마르타는 자기의 모든 고민을 털어놓는 유일한 상대인 자신의 오빠 체이스에게 무거운 짐을 맡겼다. 그 짐은 바로, 체이스가 마르타를 대신해서 여장을 한 다음 이웃영지로 가서 시녀가 되라는 것. 기사로 자라온 체이스가 어찌 그런 일을 쉽게 승낙할 수 있으리요. 하지만 몇 날, 몇 일을 계속되는 응석과 눈물에 체이스는 두 손 두발 다 들어버렸다. 그래서 지금 체이스는 여장을 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기사로 자라오기는 했지만 유난히 키가 작은 것이 콤플렉스였던 체이스였다. 게다가 먹는 건 많이 먹는데 이상스럽게 살도 찌지 않고 삐쩍 마른 체형이었던 탓에 여자옷이 작지는 않았다. 키는 마르타에 비해 5센티 정도밖에 크지 않았고, 자르기 귀찮아서 내버려둔 허리까지 내려오는 눈부신 금발머리에 햇빛을 봐도 잘 타지 않는 하얀 얼굴만 본다면 누가 봐도 여자로 보기 딱 십상이었다. "자 오빠. 거울 봐" 마르타는 자신이 꾸며놓고도 자랑스러운지 부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체이스는 끔찍스럼 기분으로 살며시 눈을 떴다. "맙소사! 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신다면 날 당장에 가문에서 쫓아내실 거다." 절규하는 듯한 체이스의 어조에 마르타는 피식 웃었다. "오빠. 너무 예쁘다. 정말 누가보면 남자라고 추호도 의심 안 할꺼야." 체이스는 이를 갈며 마르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미 하겠다고 말할 일을 이제 와서 취소시킬 수도 없었다. 그럼 마르타는 당장에 죽겠다고 떼를 쓸 것이 뻔하니까.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르타는 미소만 지으며 체이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잘 해주는 거다? 난 오빠만 믿을게. 한 달 후에 보자구." 이렇게 두 사람은 헤어져서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마르타는 수도로 체이스는 이웃 영지로. "아. 이건 마세르다 집안의 추천장이군요." "네에." 체이스는 목소리를 가늘게 내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실상 속으로는 입이 뒤틀리려고 하고 있었다. 집사인 듯한 사람은 체이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세르다 집안의 추천장에다가 이런 미모의 여자라니...... 체이스가 지금 입고있는 옷은 수수한 하늘색의 면 드레스였다. 하지만 체이스의 눈부신 금발과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 단아한 몸매(아무리 없는 가슴을 레이스 뭉치로 만들어 붙였다지만 없던 곡선미가 갑자기 생길리는 없으니 단아할 수밖에). 무엇보다 저 아름다운 얼굴. 집사는 길게 생각할 것 없이 체이스의 서류를 합격자쪽으로 올렸다. "그럼 마리안 양(체이스는 이를 갈았다. 마리안이 뭐야 마리안이). 본채 4층으로 올라가셔서 이 방으로 가세요." 집사는 체이스에게 열쇠를 내밀었다. 열쇠에는 작게 쓰여진 번호가 있었다. 15. 15호란 소린가보군. 체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열쇠를 받아들고 짐을 들었다. 마르타가 졸라맨 코르셋이 죽을 듯이 숨막혀서 얼른 이걸 벗어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간절했다. 바리바리 짐을 챙겨들고 간신히 4층으로 올라간 체이스는 쉽게 15호를 찾을 수 있었다.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리자 삐걱거림 없이 문고리는 돌아갔다. 문을 열자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와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가 하나인 걸 본 체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방은 독방이구나.' 짐을 대충 풀어놓은 체이스는 얼른 옷자락을 풀려했다. 그러다가 흠칫 놀라며 얼른 방문을 잠갔다. 문이 단단히 잠긴 것을 확인하고서야 체이스는 옷을 벗었다. "후우~~~ 죽는 줄 알았다." 코르셋을 벗어놓고 다시 대충 옷을 챙겨입고나서 체이스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내 신세야~~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하는건지 원." 그렇게 신세타령을 하던 체이스의 얼굴위로 가벼운 바람이 불어왔고, 체이스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일어나. 얼른 일어나라고."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에 깜빡 잠이 들었던 체이스는 화들짝 놀라서 깨었다. 후다닥 일어나서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체이스만한 키의(체이스의 키는 165정도이다) 소녀가 상기된, 그러나 기분 나쁘지는 않은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잠을 자니? 너 이름이 마리안 맞지? 오늘 여기에 온거 맞지? 잘 부탁해. 난 여기 온지 좀 됐어. 내 이름은 릴리고, 나이는 열 여덟이야. 넌 몇 살이니?" "아.... 저 열 여덟이야. " "어머. 잘 됐다. 나랑 동갑이네? 우리 잘 지내보자고." "으응"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는 릴리의 말에 체이스는 정신이 없었다. 릴리라....저 소녀와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쾌활하고 명랑한 분위기에는 어쩐지 팬지나 데이지가 어울릴 것 같은데. 까만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약간 그을린 얼굴에 밝은 표정의 릴리는 즐겁지 않으면 안된다는 듯한 태도로 연신 체이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체이스는 그런 릴리의 태도에 조금은 얼떨떨하고 정신이 없었지만 어차피 할 말도 없는 거, 릴리가 말을 거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릴리는 체이스에게 주방으로 내려가 주방일을 배워야한다며 끌고 내려갔다. 그 와중에서도 쉴 새 없이 말을 해댔다. "근데 너 그거 아니? 마리안?" "응? 뭘 말야?" "이번에 우리 영지에 오시는 클라리드 경 말이야." 순간 체이스의 눈에 확 불이 켜졌다. 가데스 클라리드. 자기가 여기에 온 목적이 아닌가. 체이스는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뭐?" 조금은 다급하다 싶을 정도로 릴리에게 다음 말을 재촉하자 릴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왜 그렇게 성급하게 물어보니? 알고 있는 분이야?" 체이스는 순간 뜨끔했다. 그래서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아, 아니. 그냥. 듣기는 많이 들었거든. 그래서 궁금해서 그러지." "그래?" "그런데 어서 말해봐. 그 사람이 뭐?" "아니. 나도 한 번 본적이 있는데 참 잘생기신 분이야. 너도 보면 반할꺼야. 난 한 눈에 반했다고. 뭐 어차피 그런 귀족 어른이야 우리한테는 그림의 떡이지만 말야." "설마. 난 안 반할꺼야." 체이스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남자를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테니까. 그러자 릴리는 피식 웃으며 두고보자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갑작스레 들려오는 천둥같은 목소리에 체이스와 릴리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는 소리가 들려온 계단 윗쪽을 올랴다 보았다. "이크.....세레나 부인." 릴리는 움츠러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체이스는 계단위쪽에 서있는 부인을 바라보고 들릴 듯 말 듯 휘파람을 불었다. 아무리 기사수업을 받은 체이스라지만 그 부인의 주먹 한방이면 나가떨어지기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나..... "너! 어디서 경망스럽게 휘파람을 부는거야!" 바로 머리위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체이스의 고난의 나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첫 날 세레나 부인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은 후부터 체이스는 죽도록 주방에서 시달려야 했다. 태어나서 주방일이라고는 야외에서 몇 번 야영해본 적밖에 없는 체이스가 어찌 주방일을 능숙하게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야영할 때는 병사들이 옆에서 도와줬으니, 아니 거의 다 해줬으니 체이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칼이라고는 바스타드 수준의 장검만 잡아온 체이스가 식칼이라니. 그것도 과도.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체이스는 시녀의 입장인데다가 시녀장인 세레나 부인은 첫 날부터 어쩐지 체이스를 유독 괴롭혀왔다. '차라리 무거운 감자 푸대를 나르라면 낫겠다. 이게 뭐람. 제기랄.' 잘 되지도 않는 칼질로 감자껍질을 벗겨내면서 체이스는 속으로 투덜투덜거렸다. "또 농땡이야?" "아..아니요." 또다시 체이스가 일하는 걸 감시하려고 온 세레나 부인이 무겁게 입을 열자 체이스는 놀라서 후다닥 감자에 집중했다. 세레나 부인은 한참동안 체이스가 감자 껍질 벗기는 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저쪽으로 사라졌다. "히유~~~" 체이스가 감자를 내려놓자 릴리가 다가왔다. "마리안. 많이 힘든가봐?" "몰라. 몸보다도 세레나 부인의 눈치가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하겠어." 릴리는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리고 웃었다. "세레나 부인이 니가 마음에 들었나봐." "뭐? 설마. 그럴 리가." 체이스가 기겁하여 말하자 릴리는 정색을 했다. "아니야. 진짜라고. 저 부인은 자기가 마음에 든 사람들한테는 특별히 저렇게 따끔하게 가르친다니까." "하지만 눈에 들어서 좋을게 뭐가 있는데?" "좋을거야 많지. 저래뵈도 세레나 부인은 주인님이랑 각별한 사이라고. 주인님이 태어나셨을 때부터 유모님이셨다니까. 그러니까 세레나 부인눈에 잘 들면 주인님을 통해서 좋은 집으로 시집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실제로도 여러사람이 그래왔고" '헤에. 그럼 더더욱 난 잘 보이면 안 되겠군.' 체이스는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냥 미소만 지었다. 여기와서 일주일동안 느낀건데 릴리는 너무 말이 많았다. 덕분에 체이스는 알고싶지 않아도 릴리의 여러 가지 일들을 알 수 있었다.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오빠 하나, 여동생 하나고 어디서 태어났고, 아버지 어머니가 어떻게 결혼하셨는지, 릴리의 첫 사랑은 누구이며 어떻게 생긴 남자이고 어떻게 좋아했는지 등등. 그리고 덩달아 이렇게 말이 많아지는 릴리를 진정시키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그냥 미소지으면 릴리가 무의식중에 말을 끊는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체이스는 그냥 미소지었다. 미소짓는 체이스를 보며 릴리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세레나 부인이 마리안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도 이해해. 저렇게 예쁜데 누군들 좋게 안 보겠어. 나도 마리안 반만큼만 예뻤으면 좋겠다.' 어렸을 때부터 예쁘다는 소리라면 경기를 하는 체이스를 두고 릴리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릴리가 자리로 돌아가자 잠시 밖에 나갔던 세레나 부인이 들어왔다. "자. 여러분. 클라리드 경이 도착하신 것 같군요. 모두 본채로 나가서 정렬하세요." 세레나 부인의 말에 시녀들은 수런거리며 본채로 향했다. 체이스도 릴리와 함께 본채로 향했다. '드디어 왔구나. 클라리드 경.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좀 보자. 만약에 내 기대 이하면 마르타. 각오해.' "아. 클라리드 경. 정말 오래간만에 뵙는구나." 옆에서 릴리는 쉴새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체이스는 웃음이 나왔지만 꾹꾹 눌러참고 시녀들을 따라갔다. 식당이 있는 별채에서 본채까지는 5분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그 사이에는 가로수 길로 만들어져있었다. 마침 계절이 봄인지라 파릇파릇하게 돗아나는 잎들이 싱그러워 보이는 가로수 길이었다. 본채에 다 도착하자 어쩐지 분위기가 웅성웅성해 보였다. 또 그렇게 시끄러우면 응당 나서서 조용히 시켰을 세레나 부인도 조용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체이스가 언뜻 보니 몇 명의 사내들이 몰려서 있었고 그 가운데서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고급인듯한 옷을 입고있는 사내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어깨까지 오는 검은 단발머리를 깔끔하게 빗어넘겨 약간은 날카로운 듯한 이미지를 주는 남자였다. 키는 크고 체격도 좋아보였다. 177~178정도의 키에 딱 보기에도 건장해 보이는 어깨. 체격이 작은 체이스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몸매였다. "릴리. 저 사람이....." 체이스는 그 남자를 가리키며 릴리에게 속삭였다. "누구? 저기 검은 머리?"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릴리는 피식 웃었다. "저 사람이 우리 주인님이야. 잘 생겼지?" 끌끌....릴리는 남자라면 누구든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만. 체이스는 속으로 고개를 가로젓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 사람이 오렌 경이구나. 깨끗하고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남자. 그런데 왜 저렇게 화를 내고 난리야? "아니. 그래 어디서부터란 말이냐?" 그 앞에서는 말구종의 옷을 입고있는 남자가 고개를 조아리며 쩔쩔매고 있었다. "아.....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멀리는 아닌 듯 싶습니다." "에잇! 나도 모르겠다. 알아서들 해." 사내는 화를 버럭 내버리며 들어가 버렸고 앞에 몰려있던 사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 옆에 서있던 세레나 부인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시녀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정렬은 잠시 후로 미루겠습니다. 잠시 일이 생긴 듯 하군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 하던 일을 마치도록 하세요." 웅성거리며 시녀들은 다시 주방으로 갔다. 올때와는 다르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간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잠시 후.......체이스는 왜 모였다가 다시 해산했으며 오렌 경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시녀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알 수 있었다. 이유인 즉슨...... 마차를 타고 얌전히 오기로 되어있던 클라리드 경이 마차안에 얌전히 계신줄 알았는데 다 도착해보니 마차안에 없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는 얘기는...... 마차안에서 도망을 쳤다는 얘기인데....' 체이스는 당장 돌아가 마르타의 볼기짝을 때려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제기랄. 나이가 몇 살인데 마차안에서 도망이야. 그런 놈은 아무리 상판때기가 잘났다고 해도 좋아할 수가 없는 인종이라니까. 마르타. 너 각오하고 기다려라.' '흠칫' 찻잔을 들던 마르타는 웬지 모르게 오싹해지는 느낌에 찻잔을 가볍게 달그락거렸다. "어머. 마르타야. 춥니?" 고모는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아니요." 마르타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올렸다. "누가 갈래?" "저요!!!!" 세레나 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체이스는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마리안 너는 안돼." 단호한 목소리. 체이스는 울상이 되었다. "왜요. 제가 갈께요." "아무튼 안돼. 다른 사람 없어?" 하지만 시녀들 모두가 조용했다. 누가 성밖 호수까지 물을 뜨러 가고 싶겠는가. 그것도 무거운 물통을 두 개씩이나 들고. 짜증이 나서 괜시리 어항물을 갈겠다고 호수물을 떠오라며 짜증을 부리는 괴팍한 주인님 때문에 지금 물을 뜨러가야하는데 마침 성안에 있던 남자들은 모두 클라리드 경을 찾으러 나가고 없었다. 해서 시녀들 중에 누군가가 물을 뜨러가야했다. 그나마도 일손이 모자라서 한 두 사람밖에 갈 수가 없었다. 헌데 나서는 사람이라고는 체이스뿐이었다. 체이스야 골치아픈 부엌일보다는 단순한 육체노동이 더 좋은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세레나 부인은 체이스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부인. 제가 갈께요. 저 힘세요." "음........할 수 없지. 그럼 릴리랑 둘이 갔다와." 한숨을 내쉬며 하는 세레나 부인의 말에 릴리는 울상이 되었다. 그 무거운 물통을 들고 왔다갔다 해야 하잖아. 마리안 미워. 릴리의 시선을 느낀 체이스는 속으로 웃었다. 걱정마라. 내가 설마 너를 물통을 들라고 시키겠냐? 아무리 여장을 하고 있어도 난 남잔데. 이렇게 해서 릴리와 체이스는 성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체이스는 성밖으로 나가는 도중에도 릴리의 무수한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너 때문이야. 난 이렇게 무거운 거 들기 싫단 말야. 왜 이런거 한다고 했어." 예상했던 일이지만 잔소리가 끊이지 않자 체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걱정하지마. 내가 다 들고갈게." "어머머머. 얘는. 네가 그러면 내가 천하에 나쁜애가 되잖니. 됐어. 대신 나한테 한 번 빚진셈 치는거야. 알았지? 알았지? 몰라? 왜 대답이 없어? 얼른 대답해." "아 알았어." '그냥 내가 들고갈게' 라고 말하려던 체이스지만 릴리가 따발총처럼 말을 해대자 그냥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정말 못 당하겠다니까. 난 나중에 결혼하면 절대 수다많은 여자랑은 결혼하지 말아야지' 속으로 은근한 다짐을 하는 체이스였다. 이런저런 릴리의 수다를 들으며 어느 새 둘은 호수에 도착했다. "후와~~~" 체이스는 호수를 보며 감탄해버렸다. 반짝거리는 호수의 표면은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 때문에 더욱 빛나보였다. 마치 수천마리의 개똥벌레를 잡아 호수위에다 흩뿌려놓은 것처럼 작은 호수는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예쁘지?" 체이스의 마음을 눈치챈 듯 릴리가 미소지으며 물었다. 체이스는 어쩐지 감격해버려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나중에 우리 영지에 돌아가면 우리 영지에도 이런 호수가 있나 찾아봐야지.' 체이스는 감상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물통은 기울였다. 몸통보다 더 큰 듯한 물통으로 빛이 새어들어오는 모양으로 물이 차들어왔다. 금새 물은 물통에 찼고 체이스는 물통은 옆에 두고 손을 모아 호수의 물을 두 손 사이에 담았다. 물은 입에 갔다대자 이가 시릴만큼 차가웠다. "하아~ 시원하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시원한 물줄기의 느낌에 체이스는 미소지었다. 릴리도 체이스를 따라서 물을 마셨다. "마리안. 이제 그만 가자." 릴리의 재촉에 체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그 때였다. "끄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남자의 비명소리가 호수를 둘러싸고있는 숲을 메웠다. 둘은 흠칫 놀라며 서로를 바라봤다. 릴리는 순간적으로 들려온 소리에 놀란 듯 몸을 떨었다. "마.....마리안. 이....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응?" 체이스는 잠시 생각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이런 인적이 드문 숲속에서 저런 비명소리라는 건....... 아무래도 이거 심상치 않은데? 말려들지 않는게 최선책이겠지만 비명소리가 이렇게 가깝게 들려올 정도의 거리라면 분명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일일거란 말이지. 그렇다고 하면....나 혼자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릴리가 옆에 있으니..... ' "마...마리안." "응..응?" 릴리가 팔을 잡아끄는 바람에 정신이 든 체이스는 일단 떠는 릴리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릴리. 넌 여기서 꼼짝하지 말고 있어. 알았지? 무슨 소리가 나도 움직이지 말고. 주위가 다 조용해지면 그 때 성으로 달려가서 알려. 명심해! 완전히 조용해질때까지, 또는 내가 널 부를때까지 움직이지마. 알았지?" "으....응." 릴리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체이스는 릴리를 앉혀놓고 마침 주위에 있던 부러진 나뭇가지 중 크고 굵은 걸 골라들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제기랄. 치마 우라지게 불편하구만.' 투덜거리며 걷다가 가려져있는 수풀을 확 들추자 피비린내가 확 끼쳐왔다. 체이스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이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복면을 하고있는 남자 셋이 한 남자를 둘러싸고 칼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었다. 복면을 쓰고있지 않은 남자는 흰 옷을 입고있었는데 하얀 옷은 옆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복면남자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얼른 보기에도 흰 옷의 남자는 무척 지쳐보였고 그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있었다. '조금 전 그 소리가 저 복면 남자의 비명소리였구나. 넷이나 되는 괴한이라....그것도 넷이서 한 사람을. 이거 수상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기사로 자란 체이스가 이런 광경을 보고 넘어갈리 만무했다. "이봐. 한 사람에 셋이라니 너무 불공평하잖아?" 체이스는 이렇게 말하며 수풀을 걷고 나갔다. 네 사람의 시선은 체이스에게 향했다. 복면을 쓴 셋중 한 남자가 분통이 터진다는 어투로 말했다. "이봐. 계집애. 일찍 죽고싶지 않으면 얼른 꺼져. 지금 본 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글쎄....난 말야." 체이스는 쓰러진 복면의 칼인 듯한, 옆에 떨어져있는 칼을 집어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셋이서 한사람한테 덤비는 놈들 말은 믿을 수가 없어. 내 뒷통수를 후리러 올수도 있는 거잖아?" "저 계집애가........좋아. 같이 죽여준다." 저 쪽에 있던 흰옷의 남자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이런. 아가씨. 얼른 피해요. 나 때문에 아가씨까지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할 수는 없어요." 상당히 톤이 낮은듯한, 그러나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어쩐지 편안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도 체이스는 분통이 터졌다. '도대체 어째서!!!!모두들 한치의 의심도 없이 나를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복면의 남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하나는 체이스에게, 나머지 둘은 흰옷의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체이스를 우습게 본 거였다. 정식기사로 수업받아왔고 영주의 후계자로 큰 체이스가 이런 괴한들에게 당할 실력은 아니었던 것이다. 흰옷의 남자가 둘에게 고전하고있을 때 체이스는 피도 튀지않게 한 남자를 처리해버리고 다가가서 흰옷의 남자를 상대하고 있던 둘 중 하나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비록 뒤에서 상대를 찌른다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둘이서 한사람에게 덤비고 있는 상황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남은 괴한은 흰옷의 남자가 가볍게 처치해버렸다. "후우." 흰옷의 남자는 땀을 닦으며 체이스를 바라봤다. "대단한 검술 실력이시군요. 아가씨." "별 말씀을. 그런데 이 자들은 누구길래 댁을 노리고 이런 호젓한 숲속까지 온 거죠?" "아.......저 그건........" 주저하는 남자를 보고 체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됐어요. 뭐. 말하기 싫으시다면 말 안해도 돼요. 그런데 이칼은......" 체이스는 자기가 들고있던 칼을 바라보며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이 칼에 달려져 있는 인장은 분명히..... "수도에 있는 길드에서 거래하는 고가품인 것 같은데 왜 이런 촌동네까지 온거지?" .................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체이스는 남자가 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아....저 왜요?" "그건 어떻게 아시죠?" "네?" 남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 칼이 수도에서 거래된다는 사실. 그리고.......아가씨의 칼 솜씨." 체이스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의구심이 가득 차 있는 얼음같은 파란 눈동자. 한 치의 빈틈만 보여도 날카롭게 파고들어올 듯한 눈이었다. 이런 유형의 사람에게는 절대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 순진한 얼굴을 하고도 사람심리를 간파하는 타입이다. 체이스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생명의 은인인데 제가 대답하기 싫은 건 대답하지 않을 권리정도는 있는 것 아닌가요?" 체이스의 말에 남자는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체이스의 짧은 말에는 '너도 대답 안 했는데 나라고 대답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냐? 더구나 넌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있었고 난 그걸 구해준 사람이다. 어때?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더 물어볼래?' 라는 의미가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바보는 아니었는지 얼른 알아채고 쑥쓰러운 듯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헌데...이름이라도 알려주시겠습니까? 제가 보답을 하고 싶군요." 그제야 체이스는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체이스가 그렇게도 부러워하는 장신. 언뜻 보기에도 180은 넘어보였다. 호리호리한 듯 건장해보이는 체격이었다. 거기에다 눈부시게 빛나는 은발머리. 여자들이 수시로 와서 울고 갈듯한 얼굴. 체이스의 여성스러운 아름다움과는 완전히 다른, 남자다운 아름다움이었다. '입고있는 옷으로 보면 귀족인 건 확실하군. 그럼 내 얼굴을 익혀두면 안되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체이스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혹시 공적인 자리에서라도 만나게 됐을 때 내 얼굴을 기억하면 큰 일이다.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할 일인걸요. 전 제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아니 저......" 남자가 말할틈도 주지않고 체이스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황망한 표정이 되어서 체이스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이름이라도 알려주고 갈 일이지. 쳇~" '눈부시게 예쁜 아가씨였는데 말야.' "다시 정렬." 체이스와 릴리가 성으로 돌아오고 나서 세레나 부인의 우렁찬 목소리가 다시 부엌을 울렸다. 시녀들은 다시 웅성거리며 본채쪽으로 향했다. "후아~ 이번에는 제대로 왔나보지?" 릴리의 한숨소리에 체이스는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는 이를 갈았다. '제기랄.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보자구.' 그리고............ "으헥!" "어머 왜 그래 마리안." 놀라서 소리지르는 체이스를 보고 릴리가 소근거리며 물어왔다. "아....아니." 체이스는 간신히 진정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저 남자는......' 클라리드 경이라고 나타난 사람은 아까 숲속에서 만난 그 남자였다. 괴한들에게 습격당하고 있던 흰옷의 남자. '저 사람이 클라리드 경이었구나. 조심해야겠다. 젠장. 아까 괜히 도와줬어. 상판 하나는 쓸만하구만. 그래. 마르타 너 보는 눈은 있구나. 얼굴만. 그런데 저 치는 왜 그런 숲속까지 가서 괴한들한테 당하고 있었던 거야?' 시녀들 틈에서 속으로 궁시렁거리고 있는 체이스를 놔두고 오렌경과 클라리드 경은 안채로 사라졌고, 다시 세레나 부인의 목소리가 시녀들 사이로 울렸다. "자. 그럼 저녁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세요." "시...싫어요!" 체이스는 거의 발악 수준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세레나 부인은 단호했다. "얼른 하지 못해?" 십분 정도를 버티던 체이스는 세레나 부인의 강경한 태도에 두 손을 들고 접시를 들고 식당으로 나섰다. '으윽~ 들키면 끝장인데. 왜 하필 날더러 서빙을 하라고 하는거야. 제기랄!!!!!!' 세레나 부인은 클라리드 경의 식사대접 서빙을 체이스더러 하라고 시켰고, 체이스는 어쩔 수 없는 절망감을 느끼며 서빙을 나선 것이었다. 속으로 단단히 각오를 하고,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한 번 한숨을 크게 쉬고 나서야 체이스는 식당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화려한 식당의 테이블에는 여기저기 화사한 장미꽃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보기드문 진미들이 먹음직스럽게 놓여져 있었다. 몇몇 시녀들과 함께 식당에 들어선 체이스는 될 수 있는대로 클라리드 경의 반대쪽에 서려고 노력했다. 오렌 경과 클라리드 경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었고,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그런데 가데스." "응?" "너 도대체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옷이 그 모양이 돼서 돌아온 거냐?" 흠칫. 체이스는 깜짝 놀라 손을 멈칫했다. 제기랄..... 사람 놀래키나? "아 그거?" 가데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수도에서부터 날 따라온 자식들인 것 같더라고. 그래서 숲에서 한바탕 했지 뭐." "뭐?" 오렌 경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가데스와 시녀들이 모두 찔끔 놀랐다. "뭘 그리 놀래. 제니엘. 나한테 자객 한둘 붙은게 어제 오늘 일이야?" 가데스의 말을 체이스는 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오렌 경의 이름은 제니엘. 그리고 왕의 인척인 가데스에게 자객이 따라붙는다고.....흐음. 이거 한번 더 생각해 봐야 겠는걸. 아무리 대귀족이 좋아도 오늘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놈한테 여동생을 시집 보낼 수는 없잖아? "그래도 여긴 내 영지란 말야. 내 영지에서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뭐.....그 놈들은 니 영지에 있던 놈들이 아니고 수도에서부터 따라온 놈들이니까. 그리고.....어!!!!!" "응? 왜?" 가데스는 자신의 맞은 편, 그러니까 제니엘의 뒤쪽에 서있던 릴리를 가리키며 놀랐고, 릴리는 그런 가데스를 보면서 더 놀랐다. "저 옷, 이 집 시녀들의 옷이었구나." "응? 그게 뭐 잘못됐어?" "아니 아니~그게 아니고. 내가 숲속에서 그 놈들한테 당하고 있을 때 말야." 가데스는 심히 흥분하고 있었고, 제니엘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 때 날 구해준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 아가씨가 저런 옷을 입고 있었단 말야." '쨍그랑!' 체이스는 너무 놀라 접시를 떨어뜨려 버렸고, 그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은 체이스에게로 향했다. 물론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인 건 가데스. "어!!!! 당신!!!!!" 체이스는 속으로 '망했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가데스는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게다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친히 무릎까지 꿇고 체이스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아가씨 맞죠? 이야~ 여기서 만나네. 아가씨. 나 알죠? 왜 아까는 그냥 갔어요? 어차피 이렇게 만날 인연이었나 보네? 어때요? 아까 그렇게 도망가듯 피했는데 이렇게 날 다시 만난 기분이?" "아.....저..... 접시 좀 치우겠습니다." 물흐르듯 쏟아지는 가데스의 말에 당황한 체이스는 대충 접시를 챙겨서 후다닥 방을 나가버렸고, 가데스는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체이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런 가데스의 모습에 제니엘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 가데스...너....." 가데스는 제니엘을 보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고, 제니엘의 얼굴은 싸하게 굳어졌다. "으아아!!! 난 몰라!!!!" 체이스는 주방 한 구석에서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금색의 가느다란 실같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하필이면 거기서 그렇게 꼴사납게 들켜버릴게 뭐람.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렇게 도망가지 말고 차라리 위세나 부릴 걸. 괜히 도망갔었다. 하지만 그 놈이 그 놈일줄 누가 알았어. 제기랄. "아니! 여기서 너 뭐하는 거야?" 여자치고는 웅장하게 울리는 거대한(?)목소리. 세레나 부인이었다. "하.....하.......아뇨. 세레나 부인. 저..그게....." 세레나 부인은 우물쭈물하는 체이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너 내가 식사 시중들라고 보냈더니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지? 응?" 세레나 부인의 위세에 질린 체이스는 경련이 일어날 듯 어설프게 웃었다. "저....저기요, 접시가 깨져서 그걸 치우려고 온 거에요. 뭐 별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그냥........." 세레나 부인은 체이스의 옆에 놓인 깨진 접시 조각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접시를 치웠으면 다시 들어가지 않고?" "아.....아뇨. 지금 들어가려고......" "그래? 그럼 들어가 봐." "네에........." 체이스는 도살장에 끌려들어가는 소 모양으로 다시 식당쪽으로 갔다. 그러나 죽어도 식당에 다시 들어가기는 싫었다. '으으으.......가문의 수치다. 에라~~나도 모르겠다. 나중에 날 삶던지 굽던지.' 이렇게 생각한 체이스는 식당쪽으로 향하던 발길을 정원쪽으로 돌려버렸다. 나중에 세레나 부인에게 들켜서 호되게 혼이 나는 일이 있어도 될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뭐 심하게 뭐라고 한다면 그만 둬 버리지 뭐. 체이스는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는 정원수들 중에서 좀 큰 놈을 골라 그 뒤에 벌렁 드러누웠다. 짙은 보랏빛 하늘 사이에 총총한 별들은 왠지 모를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서 꾸는 꿈처럼........... "으음......" "깼어요?" 설핏 잠이 든 체이스의 귓가에 따뜻하고 나지막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없이 가라앉는 낮은 꿈의 음성. "헉!" 체이스는 순간 자신이 무슨 상황에 있는지 깨닫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세레나 부인의 말을 어기고 정원수 뒤에서 잠깐만 누워 있으려다 그만 잠이 들어버렸는데 자신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이런 상황...... 체이스는 얼른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고 있던 사람이 누구인가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뻥쪄버렸다. "다....당신은......." "잘 잤어요? 많이 피곤했나봐요? 깨지도 않고 계속 잘 자네?" 가데스 클라리드. 언제부터인지 자신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어....언제부터 보고 있었어요?" 체이스의 질문에 가데스는 씨익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밥 먹고 나서 바로 나와서 당신을 봤으니까 한...........한 시간 쯤?" "..........." 할 말이 없었다. 이 사람 그렇게도 할 일이 없나? 한 시간동안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자기 자는 모습을 보고 있었단 말야? "저....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틀림없이 나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그 세레나 부인이 보자마자 안달일 테지. "아..........잠깐만." 몸을 일으키는 체이스의 손목을 가데스가 잡았다. 덕분에 체이스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앉자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왜요?" 가데스는 웃음을 흘렸다. "이름이 뭐에요?" "에? 제 이름이요?" 끄덕끄덕. 체이스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음..그런 웃음으로 여자들을 꼬셨나 보군. 하긴 내가 여자라도 이런 놈한테는 안 넘어가고 못 배기겠다. 마르타. 널 이해하마. "마리안입니다." "그래요? 내 이름은 가데스에요. " "에? 아...예. 알고 있었습니다." 조금은 어리버리한 체이스의 말에 갑자기 가데스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체이스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정말이요? 야! 이거 영광이네?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네?" 체이스는 완전 패닉 상태였다. 뭐야. 이 놈. 멀쩡한 놈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나사가 하나 빠진 놈이잖아? 이런 놈한테서는 얼른 피하는게 상책이다. "저......죄송합니다. 하던 일이 남아 있어서." 체이스는 얼른 손을 빼고 달아나듯이 안채로 사라져버렸다. 그런 체이스의 뒷모습을 보던 가데스는 한숨을 쉬었다. "에휴~~~또 달아나버렸네. 하지만 앞으로 한 번이야. 그리고 다음부터는 없다고."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가데스는 씨익 웃었다. 체이스에게 보이던 미소와는 달리 싸늘하고 냉정하기 이를데 없는 차가운 미소였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거야?!!!!!!!" 역시! 세레나 부인의 벼락같은 호통소리를 들으며 체이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얼마나 설교를 하시고 끝내시려나. "벌로 오늘 설거지는 네가 다 하는거야. 알았어?" "네에......" 속으로 내심 오늘 설교가 무척 짧다고 느끼는 체이스였다. 하지만 저 많은 설거지를 언제 다 끝내려나. 한숨을 쉬면서도 육체노동쪽이 정신 노동보다는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 체이스. 세레나 부인은 부엌에 체이스를 혼자 남겨두고 표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에 다시 와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주인님. 잠이 안 오세요?" 제니엘은 침대 옆 탁자에 앉아서 보던 책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세레나 부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그런 걸 묻는거야? 세레나." 어머니가 자신을 낳으면서 돌아가신 탓에 유모인 세레나 부인을 어머니처럼 여기고 잇는 제니엘이었다. 그런 세레나 부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레나 부인은 웃으며 제니엘에게 다가왔다. "주인님이 어쩐지 불편해 보이셔서 그래요." "훗! 역시 세레나한테는 뭘 숨길 수가 없다니까." 쓴웃음 짓는 제니엘을 보면서 세레나 부인은 얼굴에 미소를 거뒀다. "또 마리안 때문이신가요?" 세레나 부인의 말에 제니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마리안을 본 그 순간부터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괴로워해야했다. 마치 빛 속에서 만들어진 천사처럼......한없이 순수하고 아름답기만 한 소녀...... 그냥 안아버릴 수도 있었지만 단순히 행위로 치닫기에 자신의 감정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바라보기만 했었다. 언젠가는 그 감정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히지만 역시 세레나 부인은 예리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감정을 단박에 알아내어버린 그녀. 역시 세레나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며 그냥 웃어넘겼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누군가 알아버린 것에 대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그 알아차린 상대가 세레나 부인이라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쨌든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삭이고 마리안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던 차에 기다리던 친구 가데스가........그녀(?)를 원한다고...... 가데스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에게 말했었다. 아직 철없던 시절이었지만 그 때부터 가데스는 같이 놀던 무리의 친구들과는 남달랐었다. 그런 가데스가 정말 평소의 장난기 어린 말투와는 다르게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건...아마 열살때였나? 그 때, 수도의 세나리스 가의 녀석 집에 초대되었을 때였다. 어쩌다 우연헤 여자 얘기가 나오자 평소에는 낄낄대던 녀석이 얼굴을 확 굳히고 진지하게 말을 했었다. 마치 길거리에서 치한에게 당할 뻔한 여자를 구해줬을 그 때의 얼굴처럼. '난 있지. 딱 한 번만 사랑할 꺼야. 첫 눈에 내 운명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상대를 말야. 그리고 그 여자가 내 운명이라는 확신이 들면 무슨 수를 쓰던지 그 여자를 행복하게 해 줄꺼야.' '그런데 그 여자는 너를 자기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럼 어떻게 할 껀데?' 장난스레 던진 제니엘의 말에 가데스의 눈빛은.....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싸늘했었다. 그렇게 싸늘한 눈빛으로 얼음같은 미소를 지으며 가데스는 말했었다. '그럼 지옥끝까지 가서라도 내가 자신의 운명의 상대라는 걸 알게 해줘야지.' 그런데......그런 놈이......나의 그녀를......사랑한다고? "젠장." 낮게 욕설을 내뱉는 제니엘을 보면서 세레나 부인은 굳은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안으세요." "뭐?" 갑작스런 말에 오히려 제니엘이 당황했다. "주인님의 그런 모습, 제가 보고있기 힘들어요. 망설이지 마시고 그냥 안으세요. 정말 사랑하신다면 그냥 안으세요. 그리고 정실 부인으로 맞으세요. 신분의 차이같은 건 상관없잖아요. 주인님은 강한 분이시니까." "하지만! 세레나.........그녀가 원하지 않을꺼야." "아니에요!!! 여자라면 주인님을 원하지 않을 리가 없어요. 그리고 설령 정말 그렇더라도 여자는 일단 안기고 나면 그 남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 더 망설이실 건가요?" 세레나 부인의 강경한 말에 제니엘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녀가 원하지 않으면.......하지만.......가데스! 가데스를 생각하자 제니엘은 속에서 불이 확 치솟는 것 같았다. 그 녀석. 그 녀석이 더 그녀에게 접근하기 전에.... "세레나. 마리안을 이리로 불러줄래요?" "네. 주인님." "휴우~~~겨우 다 끝났다." 체이스는 만족스럽게 접시들이 쫘르륵 놓인 찬장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이제 가서 자자.훗훗훗~ "뭐야. 벌써 끝난거니?" "허걱!"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세레나 부인의 그림자에 체이스는 기겁을 했고 세레마 부인은 그런 체이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아....아뇨. 그냥." "흐음...어쨌든 일은 다 끝난 것 같군." "네. 이제 가서 자도 돼죠?" 자신만만하게 웃는 체이스의 모습에 세레나 부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했다. 저 예쁜 아이를 강제로........하지만 곧 도리질을 쳤다. 이건 내 아들같은 주인님을 위한 일이야. 그리고 귀족집의 정실부인이 될 수 있는 기회인데 저 아이가 싫어할 리 없잖아. 그래. 이건 서로를 위한 일이라고. "그래. 그런데 그 전에 이걸 주인님께 가져다 드려." 하고 말하며 세레나 부인은 들고 온 와인이 담긴 쟁반을 내 주었다. 체이스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쟁반을 들고 이층으로 향했다. "이것만 가져다 드리면 가서 자도 돼죠?" 마지막으로 자신의 양심을 찌르는 체이스의 말에 세레나 부인은 어색하게 고개는 끄덕였다. "그.....그래." 하루종일 정신적으로 힘든일만 있어서 그런지 이층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젠장. 얼른 이 일을 때려치워야지 원.' 고개를 돌려가며 속으로 투덜대는 체이스의 뒤에서 갑자기 웬 그림자가 쑥 튀어나오더니 체이스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어엇!" 체이스는 너무 놀라서 들고있던 와인이 담긴 쟁반을 떨어뜨릴 뻔했다. 다행히 쟁반은 떨어뜨렸지만 와인병은 잡을 수 있었다. '어떤 놈이야!!!' 이를 갈며 뒤를 돌아본 체이스의 눈에 싱글싱글 웃고 있는 가데스가 들어왔다. "놀랐어요? 미안해요. 뒷모습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그만......그런데 왜 이리 말랐어요? 세상에 뼈밖에 없네." 가데스의 말에 체이스는 울컥했다. 이런 바람둥이 같은 놈. "여자 뒷모습이 예뻐보이면 아무나 가서 안아버리시나 보죠? 좀 좋지 않은 습관이군요." 체이스의 말에 가데스는 정색을 했다. "아니에요. 나 여자를 끌어안아 보기도 마리안 양이 처음이었다고요. 내가 함부로 여자나 찝적거리고 다닐 그런 놈으로 보여요?" 물론 그렇지. 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고 다시 쟁반을 집어든 체이스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가데스가 계속해서 따라왔다. "어디 가는 거에요? 이 밤중에 웬 술? 어디로 가는 건데요?" "...........주인님 방에요." "제니엘 한테요? 그럼 내가 대신 들고 갈께요. 줘요. 내가 들고 갈께요." "안돼요. 그럼 세레나 부인한테 혼난다고요. 제가 직접 들고가야 해요." "하지만 이런 늦은 밤에 남자방에 마리안 양 혼자 보내기 싫은데요? 아무리 내 친구지만 마리안 양을 남자한테 보이기는 싫다고요." '얼씨구? 이제 가지가지 하시네. 니가 나한테 뭔데?' 이제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체이스는 그냥 걸었다. 하지만 가데스는 끈질기게 따라왔다. "같이가요. 나도 이렇게 된거 가서 그 친구랑 술이나 한 잔 해야겠네." "따라오시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하세요." 가데스는 가시돝힌 체이스의 어투에 미소를 지으며 따라갔다. 제니엘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마리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원하지 않으면.....난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게 아닐까? 그녀는......난 원할까? '딸깍' 살며시 문이 열리고......마리안이 들어왔다. '아!' 역시.....너무나 아름답다. 감히 손대기가 두려울 정도로. 빛으로 만든 요정처럼. 하얀 피부는 깨끗한 마리안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고, 금실같은 긴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뒤로 묶여있어서 단아해 보였다. "이거.....어디에 놓을까요?" 약간은 가라앉은 듯한 차분한 목소리에 제니엘은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는 걸 느꼈다. "아.....여기에." 제니엘은 자신이 기대고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예." 디소곳하게 말하고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보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자네, 이 밤에 무슨 술이야. 술은. 그리고 마시려면 나를 불렀어야지." 가데스가 마리안과 같이 들어왔다. '제기랄!!!!!' 뭐가 좋은지 가데스는 싱글싱글 웃으며 속으로 투덜대고 있는 제니엘의 속도 모른채 탁자에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는 연신 싱글거리며 마리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리안은 가데스의 시선이 불편한지 고개를 푹 숙이고 쟁반을 내려놓고 얼른 나가려 했다. "아...잠깐만요 마리안." 가데스가 재빠르게 방밖으로 나가려는 마리안의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았다. 순간 제니엘은 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는 것 같았으나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았다. 하지만 가데스에게 붙잡힌 마리안의 하얀 손목을 보며 분노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제니엘의 속도 모른 채 가데스는 마리안의 손목을 계속 잡고 있었다. "내가 아까 한 말....믿어줄꺼죠?" 마리안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까 가데스가 했던 말이 뭐지? 제니엘은 의구심에 가데스를 바라봤다. "나...정말 여자를 끌어안은 건 마리안이 처음이에요. 믿어줄꺼죠?" 미칠 것 같았다. 끌어안아? 마리안을...... 그녀의 빛이 사라질까 두려워 감히 손도 못 대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오늘 처음 만난 네가 끌어안아? 가데스를 만난지 10년.......오늘 처음으로 그에게 맹렬한 살의를 느꼈다. 한편 가데스는 손을 빼내려고 애쓰는 마리안에게서 대답을 들을 때까지는 손을 놓지 못하겠다는 듯한 태도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답해줘요. 마리안." "네에...믿어요. 그러니까 이것 좀......" "정말이죠? 알았어요. 이제 가서 쉬어요. ^^" 가데스는 밝게 웃으며 마리안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놓았고, 마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사라졌다. 제니엘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오늘은 병나발을 불어야겠군. "휴우~~~" 제니엘의 방에 술을 가져다주고 체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몸이 하루종일 혹사를 시켜서 그런지 찌뿌둥했다. "아니.....! 너 왜 여기 있는거지?" 갑작스레 천둥같은 목소리에 체이스는 움찔했다. 아니나다를까........ "세레나 부인......주인님 방에 술 가져다 드리고 가서 자라면서요," 순간 체이스의 눈에 세레나 부인이 움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겠지...... "그.....그래. 주인님은 지금 뭘하고 계시지?" "클라리드 경과 하께 술을 드시고 계십니다만......" "그래? .........알았다. 들어가서 쉬어라." "예." 체이스는 다소곳하게 말하고 몸을 돌려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 세레나 부인은 혀를 찼다. '이런 이런.....친구가 이런 때 도움이 되지를 않는군.........' "음냐아........" 가데스는 풀썩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널부러졌다. 테이블 위에 나뒹굴고 있는 많은 술병들과 함께. 원래는 이렇게 많이 마시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친구집이라는 편안함 때문인지 가데스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널부러진 가데스와는 달리 제니엘은 마셔도 마셔도 취기가 오르지 않는 자신을 탓하며 혼자 자작을 하고 있었다. '제기랄.' 후회가 든다. 진작에 그녀(?)를 안아버리던가 고백을 해 버릴걸. 이렇게 자신만만한 라이벌이 등장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자신의 죽마고우. 이런 생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는 제니엘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취한 듯 했던 가데스가 일어나 쓰러진 제니엘을 침대로 옮겼다. 입가에는 아까부터 흐르던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를 않았다. 그렇게 제니엘을 옮긴 가데스는 살며시 문을 열고 방을 빠져 나갔다. "으음......" 웬지 모를 무게감에 가슴이 답답해져옴을 느낀 체이스는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천근만근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이 무게는 꼼짝도 하지를 않았다. '제기랄...하루종일 피곤했는데 이제 가위까지 눌리냐!!!' 속으로 발악을 하고 나서 체이스는 살며시 눈을 떴다. 뭔가 가위눌리는 것과는 다른 느낌의...... "헉!!!으......." 놀라서 소리를 치려는 찰라, 커다란 손이 체이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체이스의 두 손은 머리위로 제압하고, 한 손으로만 입을 틀어막고 있는.....뭔가 이상한 자세였다. "으.....으음....."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 봤지만, 천장을 보고 누워있는 자세란 힘을 주기가 애매한 위치다. 가뜩이나 체격이 작은 체이스는 어찌할 수 없는 낭패감을 느꼈다. '뭐......뭐야 이거.' 어둠이 슬슬 눈에 익숙해져 오자, 뭔가 커다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체이스는 놀람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체이스가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깨닫자 그 사람은 예의 미소를 흘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이 손 놔줄께요. 설마 나한테 깔려있는 모습을 누구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겠죠?" 체이스는 어쩌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그제야 그 사람, 가데스는 입을 막았던 손을 놓았다. 가데스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막았던 한 손을 체이스의 손을 잡는데 활용했다. "저......이...... 이것 좀....." 체이스는 손을 빼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신장차에서 오는 힘의 차이란 결코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체이스의 두 다리까지 자신의 다리를 이용해서 꼼짝 못하게 만든 가데스는 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한밤중에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놀랐죠?" '이게 찾아온 거냐? 숨어든 거지. 그리고 니가 이 입장이라면 안 놀라겠냐?!!!' 이렇게 속으로만 외친 체이스는 정작 겉으로는 아무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데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걷혀졌다. 그리고.......... '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갑작스레 가데스의 입술이 체이스를 덥쳐왔다. '이.........이거어어언!!!!!!!!!' 명실공히 첫 키스를 남자에게 뺐긴 것이다. 체이스가 얼빵하게도 놀란 나머지 헤벌어진 입술 사이를 가데스는 놓치지 않았다. "읍....." 가데스의 혀는 집요하게 체이스의 혀를 말고 들어왔다. '시.......싫어!!!!!!!!!이 자식 이거 변태 아냐?' 체이스는 끔찍스런 혐오감을 느끼며, 가데스의 혀를 꽉 깨물어버렸다. "읍!" 가데스는 움찔 놀라며 체이스를 가볍게 밀쳤다. "하아......하아........." 체이스는 숨을 헐떡이며 가데스를 노려보았다. 잠시 혀의 통증에 끙끙대던 가데스는 고개를 들더니 씨익 웃으며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많이 놀라게 했나보군요." "..........." 원래 성격대로라면 당장 가서 이빨이 한 두 개쯤 날아가도록 쳐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를 꽉 깨물고 참고 있었다. 하지만 분한 마음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가데스는 부드럽게 말하며 체이스의 몸을 뒤에서 가볍게 끌어안았다. 순간 체이스는 움찔하며, 몸을 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가데스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미안해요...미안해........." 발버둥치는 체이스를 진정시키려는 듯, 낮은 가데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해서 들여왔다. 결국 체이스는 발버둥치는 걸 멈춰야했다. "놀라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장난은 아니었어요." 계속 체이스를 끌어안고 말하는 가데스의 이 말에 체이스는 더 놀라야 했다. 지금...이 남자가 뭐라고 말하는 거지? "진심이에요. 어제 숲에서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난 당신이 내 운명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당신을 한시라도 빨리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진심이에요." "무,.......무슨........말씀을......." 놀라서 더듬거리는 체이스의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한 가데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딴에는 체이스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그 미소가 체이스에게는 더 무서웠다. (-_-;) "놀라지 말아요. 그리고 내가 일주일 후에 여기를 떠날 때, 나랑 ....같이 떠나주지 않을래요?" '이........이게 무신 소리여' "나 지금....청혼하고 있는 거에요." "............에에에에에에엑!!!!!!!"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는 체이스를 보며 가데스는 얼빵한 표정을 지었다. "노..놀라지 말아요. 마리안." 체이스를 가볍게 감싸안으며 가데스는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 줄께요. 진심이에요. 그러니까 일주일 후까지 대답 줘요. 그 때까지 기다릴께요." 말을 마친 가데스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리고 체이스는.......혼란 속에서 새벽 첫닭이 울 때까지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오빠아~~~~~" "웃기지마! 그 자식 변태얘기는 꺼내지도 마!!!!!" 가데스의 청혼을 받은 뒤, 그 날 새벽으로 도망치듯 오렌 경의 집을 빠져나온 체이스였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벌써 수도에서 돌아와 있던 마르타가 어땠느냐며 체이스를 닥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마르타를 보며 체이스는 부아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허접하기 짝이 없는 녀석....만난지 하루밖에 안되는 여자를 덥쳐오는 변태 자식. '도대체 그런 녀석이 뭐가 좋다는 거야' 마르타도 평소와는 다른 체이스의 심기가 보였는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방을 나갔다. "후우~~~~" 체이스는 마르타가 나가자 한숨을 깊게 내쉬고 머리를 휘저으며 머리를 침대위에 던졌다.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가 띵하니 흔들려서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건드리기라도 하면 터져버릴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제기랄,........." 낮게 욕설을 내뱉은 체이스는 그동안의 긴장을 일시에 풀려는 듯, 잠을 청했다. (주-한 달이 지났습니다.) "네? 정말입니까?" 체이스는 얼굴 가득 화색을 띄고 아버지인 마세르다 공작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체이스의 얼굴을 보며 마세르다 공작도 흐뭇한 미소를 띄었다. "네 녀석이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폐하께 부탁드릴 걸 그랬지 뭐냐." 체이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를 않았다. 오직 그 분을 뵙는다는 생각에 행복할 뿐이었다. 여기서 그 분이랑 누구인가............ 어릴때부터 비록 키는 작았지만(-_-) 검술에는 발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체이스가 국왕의 친척인 고모님을 뵈러 수도에 갔었을 때(이 때는 체이스가 9살이었을 때), 텃세를 부리던 체이스 동년배 녀석들과 싸움이 붙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녀석들은 체이스가 작다고 얕보고 덤벼든 거였지만, 체이스는 그 놈들을 순식간에 묵사발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체이스의 모습을 지나가던 그 분-왕자의 검술 스승인 하먼 로이얼드가 보게 되었고, 자청해서 체이스를 가르치겠다고 나서서 한 달여 동안 체이스의 검술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가끔 체이스가 수도에 올라가면 지도를 받곤 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왕자의 검술 스승이었던지라 시간이 없어서 배울 기회를 가지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체이스의 아버지인 마세르다 공작의 요청으로 하먼이 왕족들의 검술 수업을 할 때, 체이스도 같이 넣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체이스가 가장 존경하는 하먼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데 하먼에게 직접 수업을 들을 수 있다니......그것도 공식적으로. 체이스의 기분은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새상에는 좋은 일과 나쁜일 이 따라 다니는 법. 그것을 일깨워 준 것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옆에서 듣고 있던 마르타였다. "그럼 저도 따라가도 되죠? 아버지." 순간적으로 체이스의 머리에 마르타의 의도가 간파되었다. 그 변태자식!!!!!(누가 변태라는 거야!-가데스) 수도에 올라가면 틀림없이 그 변태자식도 있을텐데............ 하지만 체이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깟 변태자식이야 무시하면 그만이고,(이....이것봐.....변태가 아니라니까) 어차피 지금의 난 남자니까 봐도 지가 알아보겠어? 그리고 또 모르지. 그 놈은 나한테 관심이 있었으니까 마르타를 돌아볼지도............ (작가 주-마르타는 체이스의 5센치미터 삭제판입니다. 아주 유사하죠. 틀린건 머리 색깔인데, 체이스는 금발, 마르타는 갈색입니다.) 음...그 변태한테(-_-;;;;) 여동생을 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게 안타깝기는 하지만. 이렇게 가데스를 우습게 보며 자신의 일신에 닥찰지 모르는 불행을 가볍게 넘기는 우둔한(누가 우둔해?!!!-체이스) 한 남자가 있었으니...그 이름 체이스였다. "기분이 어때 오빠?" 그녀의 특기인 콧소리 섞인 애교스런 목소리로 물으며 마르타가 체이스에게 다가왔다. 덜컹거리는 마차 때문에 짜증이 났는지 조용히 있는 체이스에게 아까부터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걸어오는 마르타였다. 하지만 체이스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마르타 역시 체이스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쳇! 좋아서 입이 벌어지시누만. 그렇게 좋아? 그 로이얼드 공작님이?" 체이스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 분은 나의 일생의 스승이시고, 나의 인생의 목표야. 마르타." 체이스의 만족스러운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하룻동안의 지루한 마차여행이 하나도 지겹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의 스승과의 만남은 기대되고 흥분되는 것이었다. "다 왔습니다." 몸에 밴 예의바른 태도로 문을 열어주는 마부를 뒤로하고 체이스는 눈앞에 보이는 본채쪽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아마.....이 시간쯤이면 선생님은 차를 드시고 계실꺼야. 기대감에 부풀어서 행복한 하트표를 날리며 본채쪽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체이스의 몸이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확 뒤로 당겨졌다. '어라?' 빠르게 걷고 있던 차라 균형을 잃은 체이스의 몸은 장신인 그 사람(?)의 품안에 쓰러지듯 휘청이며 안겼다. 당황한 체이스가 얼른 몸을 빼려는데........ "마리안? 마리안......맞죠?" 이건.........낯익은 낮고 편안한.........이 목소리는........게다가 내 얼굴을 스칙 있는 이 은빛 머리카락은....... 체이스가 더 생각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길이 자신의 얼굴을 감싸쥐고 위로 향하게 했다. 높이차이 때문에(키 작은 게 죄지....) 고개가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얼음같이 새파란 눈동자.......... 체이스가 더 놀라기도 전에 가데스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나.....남자?" 가데스의 그 말에 순간 정신을 차린 체이스는 정신을 수습하고 가데스의 손을 뿌리쳤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통성명도 안하고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을 다짜고짜 붙잡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혹시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눈치챌까봐 화난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체이스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가데스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좌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랑 너무 닮아서 그만......전 가데스 클라리드라고 합니다." "제 이름은 체이스 마세르다입니다. 이 저택의 주인이신 하먼 로이얼드 공작님을 뵙기 위해 마세르다 영지에서 왔죠. 그럼 이만 실례." 체이스는 딱 잘라서 말하고 얼이 빠져있는 가데스를 뒤에 놔둔채 다시 안채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저 뒤에 또다른 넋이 빠진 사람-마르타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채. "오빠!!!!!!" "그만하지 못해?!!!!" 오렌경의 영지에 있을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캐묻는 마르타 때문에 하먼과의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라 마르타에 대해서 짜증이 날대로 나 있었다. 하지만 하먼은 그런 둘의 모습이 즐겁다는 듯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르타도 나름대로 화가 났는지 입을 삐죽이고는 체이스의 귀에 대고 협박을 했다. "만약에 오빠가 얘기 안 해주면, 오빠가 여장했었다는 얘기 모두에게 해 줄꺼야." "뭐어?!!!" 체이스는 낮게 소리지르고는 얼른 마르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읍읍!" 마르타가 입이 막힌 상태에서 발악했지만 체이스는 그녀의 위기(질식사 위기)는 무시하고 하먼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잠깐 마르타와 얘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러게나 조금 있다가 점심식사 시간이 되면 자네랑 같이 수업 받을 친구들이 식사하러 올테니까 그 때 밥 먹으며 인사하도록 하지. 그럼 남매싸움 잘 해결하고 오게나. 하하하~" 하먼이 생긴것처럼 호탕한 웃음을 흘리며 식당쪽으로 사라지자 체이스는 마르타를 옆 빈 방에다 처넣었다. "마르타! 이게 무슨 버릇없는 행동이야! 그것도 선생님 앞에서!" "하지만...하지만 오빠가......." 마르타의 특기 두 번째......울기....... 체이스는 난감했다. 하지만 그 역시 이런 상황에서는 마르타에게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휴우~~~알았어. 알았다구. 얘기 해준다구." "으응. 훌쩍~~~" 얘기해 준다고는 했지만 이런저런 얘기 다 할 수는 없었다. 체이스는 전후좌우 다 생략하고 요점만 얘기했다. "그러니까 내가 여장하고 있을 때(뿌드드득~~~), 저 놈이 나한테 관심이 쪼~~끔, 아주 쪼~~~끔 있었던 거야. 알았지?" "그게 다야?" 맑은 눈에 눈물을 가든 매단 채 자신을 보는 마르타를 보니 양심이 아주 쬐~~~금 찔려왔지만 체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니가 좀 적극적으로 나가도 될꺼야. 넌 나랑 아주 판박이잖아? 그러니까 이 기회에 저 놈을 녹이는 거야. 어때?" "훌쩍~~정말 그게 가능할까?" "물론이지. 자. 뚝!" "훌쩍~ 뚜욱~!"(지독하게 단순하군 마르타 양 -_-;) 이렇게 해서 어찌저찌 마르타를 달랜 체이스는 마르타를 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문밖에서부터 벌써 웅성웅성한 것이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열명 정도는 되어 보이는 건장한 청년들이 줄지어 앉아있었다. 식탁의 가운데에는 하먼과 그의 부인, 그리고 그의 14살 된 딸이 있었다. 체이스가 마르타와 같이 식당에 들어서자 일순 식당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고,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이고..쪽팔려.....' 침묵 때문에 더 쪽팔려하고 있던 차에 그 침묵을 깬 것은 역시 체이스의 일생의 빛인(그게 이거랑 먼 상관?) 하먼이었다. "아! 체이스. 남매싸움 다 끝났나? 어서 이리로 오게. 마르타 양도" 하먼은 손짓하며 자신의 옆 빈 자리를 가리켰다. 체이스는 마르타와 함께 그 곳으로 갔다. 그런데......... '이 시선은......' 아니나 다를까. 얼음같은 눈동자........ 체이스는 그의 시선을 싹 무시했다. 체이스와 마르타가 하먼의 옆자리에 앉자 하먼이 입을 열었다. "자~여러분들. 이 친구는 당분간 여러분들과 함께 수업을 들을 마세르다 공작가의 체이스 군일세. 뭐 궁금한 것들 있나?" "저렇게 작아서 검이나 들 수 있나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몇몇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런 말을 들어온 체이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저런 놈들일수록 실력이 없기 마련이지. 진짜 할 말은 대련이나 하고 하라고. "진짜 하고싶은 말은 대련이나 끝난 후에 하지 그러나." '엘레?'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 하먼의 입에서 나오자 체이스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기름독에 성냥을 던지는 행동이 될 줄이야. "너 이자식 뭐야!" 비아냥거렸던 청년은 하먼의 입에서 체이스를 옹호하는 말이 나오자 화가 나던 차에 체이스가 웃자 자신을 비웃는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발끈해서 일어났다. 체이스는 혀를 끌끌 찼다. "제발 부탁인데 식사중에는 앉아서 식사를 하시는 게 어때요? 서서 밥을 드실껀가요?" 체이스의 가느다랗고 고운, 여유로운 목소리에 남자의 얼굴은 울그락 불그락해졌다. 체이스의 목소리는 남자치고는 상당히 높은 편이라 평소에 말할 때는 느끼지 못해도 싸움을 할 때는 묘하게 상대방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남자도 그런 체이스의 목소리에 더욱 화가 난 것이다. "나와!!!!너 이자식!!! 묵사발로 만들어 주겠어. 어디서 피죽도 못 얻어먹게 생긴 놈이!" 체이스는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하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먼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을 본 체이스는 청년을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뜰에는 식사도중에 나온 구경하려고 나온 청년들이 벌써부터 원을 만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체이스보다 먼저 나온 청년은 벌써 검집을 잡고 있었다. 체이스는 그의 맞은편에 서면서 검집을 세워들었다. "체이스 마세르다입니다." 정중한 어투의 말에 남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시골구석 촌놈. 난 프레머 글렌이다." 둘은 '스르릉' 소리를 내며 칼을 뽑아들었다. 대낮인지라 눈부신 햇살이 검신을 훑고 지나갔다. 체이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걷혀지고, 그가 날쌘 검술이 발휘되었다. "읏!" 프레머는 제비처럼 날아오는 체이스의 검에 당황해서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단검 수준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날카로운 빠른 속도가 가벼운 몸이라는 조건 때문에 체이스의 레이피어에서 발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거....너무 느린데요?" 체이스는 일부러 느릿하게 말했다. 상대가 여유로우면 그럴수록 조급해지는 것이 싸움의 심리. 프레머는 검을 바꿔쥘 새도 없이 체이스가 치고 들어온 상태 그대로 몸을 날려왔다. '챙강' 프레머의 검은 어느 새 땅에 떨어져 버렸다. 프레머는 뻐근해진 손목을 쥐고 체이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가 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들어가서 식사나 하시죠 여러분." 뜰에 모인 청년들을 보며 체이스가 말했고,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하아~~~" 체이스는 잔디를 침대삼아 몸을 뉘었다. 봄날씨보다는 못했지만 초여름의 날씨 또한 잔디위에 눕기에는 편안한 온도였다. 첫 날의 신고식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라는 생각에 스스로 흡족해 하고 있는 체이스였다. 배는 부르지, 날씨는 따뜻하지, 기분은 만땅이지.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나랑도........대련 한 번 해 줄래요? 체.이.스 군. 아니. 마리안 양이라고 할까?" 냉량하기 그지없는 가데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들기 전까지는........ 체이스는 조용히 다가오는 가데스를 보며 웬지 모를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실실 웃어대며 장난을 걸어올 때와는 다른 그의 모습은.......... "하....한밤중에 뜬금없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체이스는 일부러 냉정한 척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챙~' 날카로운 검신이 가데스의 목소리만큼이나 차갑게 체이스를 압박해왔다. "검을 뽑으시지요. 마리안 양." "무슨 소리십니까. 난 남자라고요." 짐짓 화내는 척을 하며 체이스는 칼날을 피해버렸다. "만약에!" 가데스의 목소리가 체이스의 등으로 날아왔다. "만약에 당신이 날 이긴다면 난 제니엘의 영지에서 당신을 봤었던 사실을 잊어주겠어." 체이스는 살며시 몸을 돌렸다. 가데스의, 화난것보다 더 무서운 무표정한 얼굴이 들어왔다.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다. 가데스의 태도로 봐서 가데스는 마리안이 체이스였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듯 했다. 물론 체이스가 발뺌해버리면 그만이지만 가데스라면 한 번 확신이 선 이상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도 남을 사람 같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럼 당신이 이기면 어쩔꺼죠?" 라는 질문을 해서 가데스의 확신을 확고히 해 줄만큼 체이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뭐......당신의 의도가 어떤 것이든, 이기면 더 이상 난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뜻 정도로 받아들이죠." 말을 마친 체이스는 가데스가 내미는 검을 받아들었다. "체이스 마세르다" "가데스 클라리드" 결투 전의 관례대로 통성명을 한 두 사람은 검을 맞댔다. 그리고 어두운 초여름의 정원에서 그 날카로움만큼이나 청량한 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아~하아~" 체이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강하다.' 지금까지 겨루어왔던 그 누구보다도...이 가데스 클라리드라는 남자는 강하다. 도저히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날쌘 것을 특기로 하는 자신의 검술만큼이나 가데스의 검술은 빨랐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어울리는 힘이 있었다. 빠르기와 기술만을 지니고 있는 체이스의 검술은 속전속결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지만 가데스의 검술은 체이스와 겨루어서 속전속결로 끝낼 수준은 아니었다. 장시간 계속되는 대련에 체이스의 팔에서는 힘이 빠지고, 숨은 가빠지고 있었다. 히지만 가데스는 조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힘있게 검을 휘둘러 오는 가데스의 모습을 보며 체이스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쳇! 똑같은 남자이고, 똑같은 시간을 싸웠는데 왜 누구는 저렇게 팔팔한 거야. 난 파김치인데.' '챙그랑~' "아!" 체이스가 딴 생각을 한 사이, 가데스의 검은 체이스의 검 손잡이를 노리고 날아들어왔고, 체이스는 검을 날려버렸다. "자........졌죠?" 숨도 차지 않는지 차분한 가데스의 목소리와 함께 체이스의 목에 서늘한 검의 기운이 느껴졌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었던지라 꼼짝달싹 못하는 상황에서 체이스는 화난 표정으로 가데스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졌습니다. 패배를 시인합니다. 이 검 좀 치워주시죠." "................" 가데스는 아무 말 없이 체이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무......무슨......" 체이스는 당황해서 몸을 빼려했다. 하지만 등에는 나무, 앞에는 가데스의 칼이 자신을 가두고 있었다. 그렇게 목석처럼 서 있는 상황에서 가데스의 입술이 서서히 자신을 향해 오고 있었다. "읍!!! 으음!" 뜨거운 입술이 점점 무게감을 더해가고 있었다. 피하려고 몸을 움직이자 목에 움찔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체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움츠렸다. 가볍게 입술을 뗐던 가데스는 체이스의 목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체이스의 목으로 가져갔다. "읏!" 순간적으로 목을 확 달구는 뜨거운 감각에 체이스는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가데스의 강한 팔은 어느 새 검은 땅으로 떨어뜨리고, 체이스의 몸을 꼼짝도 못하게 감싸안고 있었다. 가데스는 계속해서 체이스의 목에 난 상처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흐.....흡혈귀? -_-;)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던 두 사람은 (체이스는 힘에서 눌려 꼼짝 못하고 있었다) 발악에 가까운 체이스의 몸부림에 겨우 떨어졌다. 체이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이런 재수없는 놈에게 이런....... "이......이게 무슨........" "제기랄!!!!!!!!!" '쾅!' 뭔가 가데스에게 반론을 제기하려던 체이스는 가데스가 갑작스레 자신이 등을 기대고 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주먹으로 치자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나무를 친 손에서는 빨간 선혈이 튀어올라 체이스의 볼을 스쳤다. "아........저......." "당신이 마리안 맞잖아! 아니라고 하지마. 죽여버릴테니까!"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가데스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냉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히꾹!" 많이 놀랐는지 딸꾹질이 나와버렸다. 체이스는 딸꾹질을 했다는 사실에 또 놀라서 얼른 입을 틀어막고 눈만 휘둥그렇게 뜬 채 가데스를 올려다 보았다. "풋!......하하하하하!"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자신을 올려다 보는 체이스를 보자 가데스는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누가 이 소년을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이나 하겠는가. 이렇에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데..........놀라서 토끼눈이 된 채로 자기를 올려다 보고 있는 이 모습까지도. "하하하하하하...." 허리가 휘어질 듯 정신없이 웃어대는 가데스를 보며 체이스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어기.......히꾹!" 그러나 입을 열기가 무섭게 딸꾹질은 터져나왔고, 그런 체이스를 보며 가데스는 더욱 웃을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서 겨우 진정된(그리고 딸꾹질이 멈춘) 두 사람은 나무에 기대 앉았다. 가데스의 빨갛게 부어오른 손을 바라보면서 체이스는 눈치를 살폈다. 아플텐데......... "얘기 좀...해줄래요?" "네?" 가데스의 낮은 목소리가 체이스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니까.........왜 마세르다 공작의 아드님이 여장을 하고 시녀 노릇까지 했었는지......얘기해 줘요. 뭔가 나도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겠죠?" 어쩐지.....서글펐다. 가데스의 낮은 목소리가 오늘따라 슬픈 음색을 띄고 가슴에 울렸다. "그 전에......내가 대답해 주고나면, 당신도 내 질문에 한 가지 솔직하게 대답해 줄래요?" 체이스가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데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가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고개만 끄덕인 거였는데도, 그의 행동에는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 이상의 무게감이 있었다. 체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그러니까......당신 스스로도 알죠? 당신이 여자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는 남자인지." 자조적인 웃음......가데스는 그런 웃음을 지으며 또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의 웃음이 자조를 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체이스는 말을 계속했다.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내 여동생이었어요. 이름은 마르타 마세르다. 당신을 오랫동안 바라봐 온 애고, 내게 부탁을 해 오면 난 거절할 수 없을만큼 귀여운 동생이에요. 그런데......당신이 오렌경의 영지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타는 오렌경의 시녀로라도 들어가 당신을 볼 생각이었죠. 하지만 집안에 일이 생겼고, 마르타는 내가 대신 가주기를 바랬던 거에요." "그래서......당신이......왔다?" "네." "하아~~~~~~" 가데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철없는 소녀의 부탁때문에......내가 ............ "이제 당신도 내 질문에 대답해 줄래요?" "뭐죠?" "당신은.......마리안을 진심으로 생각했었던 건가요?" 순간 살기가 도는 가데스의 눈빛에 체이스는 경직됐다. 가데스는 체이스의 좁은 어깨를 꽉 잡았다. "그걸.......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내가 .......내가......얼마나........" 이를 갈던 가데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체이스를 끌어안아 버렸다. 건장한 가데스의 품에서 체이스는 아까의 상처가 옷에 닿아 쓰라림에도 빠져나올 수 없어 고통에 곤혹스러웠다. "읏...저.저기......" "난.......있지. 일생의 단 한번만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이야. 그리고........너를 처음 본 순간 난 그 상대는 '마리안'으로 정했었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인생의 목표를 바꿔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그런데.......남자였다니....." "가데스!" 체이스는 가데스의 몸을 밀면서 강하게 말했다. "지금 난 장난도 아니고, 진지하게 당신에게 제안하는 거니까 더 이상 화내거나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들어줘요. 알았어요?" 가데스는 미심쩍은 눈으로 체이스를 바라봤지만 곧 체이스의 눈에서 진지함을 읽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마리안을 얼마나 생각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음.......내 여동생이 있다고 했죠? 마르타라고........그 애는 정말 나를 꼭 빼다 박았어요. 아니, 마르타가 오히려 아름답다고 해야겠죠. 그러니까......마르타는 마리안보다 아름다울테니까......" "나보고 마리안이 아닌 마르타를 사랑하라고?" 말로 사람을 얼려 죽일 수 있다면 가데스의 목소리는 충분히 합격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체이스는 실제로 그 싸늘함에 반쯤 얼어 있었다. "뭐.......그렇게 말하는 건 좀 어거지이긴 하지만........요점은.....그래요." '풀썩' 가데스는 앉은 자리에서 마른 풀들을 털며 일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본채쪽으로 가려다 말고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격렬하게 이어지는 딥키스............ "하아~~~" 집요하게 체이스의 혀를 파고들던 가데스는 체이스가 숨이 막혀 발버둥을 칠 때쯤에야 겨우 체이스를 놓아주었다. 그는 체이스를 끌어안고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마지막이야. 이젠........너의 여동생을 사랑해보도록 할게." 안으로 들어가는 가데스를 보면서.......어쩐지 그의 마지막 입맞춤이 처음처럼 싫지는 않았다고 느끼는 체이스였다. 진심이었나 보다........ 가데스가 했던 그 말이 결코 빈말이었던 게 아니고 진심으로 했던 말인가 보다. 이젠........너의 여동생을 사랑해보도록 할께...라고 했던 말.......... 체이스는 이층 발코니에 턱을 괴고 앉아서 아래층을 내려봤다.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우아하게 마르타의 손을 잡고 정원으로 향하는 가데스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울린다......... 남자인 자신을 바라볼 때의 가데스의 눈빛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만을 바라봐왔던 마르타를 향하고 있는 가데스의 눈빛이...... 훨씬 아름답다. 마르타가 가데스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체이스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누구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마르타. 철이 들면서부터 마르타는 절대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것은 마르타의 최소한의 자존심이었고, 신념이었다. 마르타가 그 신념을 깬 것이, 14살 때 수도에 다녀오고 나서였다. 그 때 마르타는 체이스의 방에 찾아와 밤새 펑펑 울면서 수도에 가고 싶다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만 반복했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그 이유를 말하지 않다가 체이스의 추궁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어 가데스라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을 한 것은....... 그로부터 일년이나 지난 때였다. 체이스에게만 마음을 털어놓은 마르타는 체이스 앞에서만은 가데스에 대한 얘기를 자유롭게 했고, 체이스 앞에서만은 부모님 앞에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흘렸었다. 체이스가 보기에 마르타가 가데스를 생각하면서 흘린 눈물은 태어나서 여태까지 마르타가 흘려왔던 눈물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 "잘 됐어......." 나지막하게 말하며 고개를 파묻는 체이스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잦아들고 있었다. "여기 앉으시죠." 가데스는 예의바른 태도로 마르타가 앉을 자리에 손수건을 깔아주었다. 마르타는 예쁘장한 얼굴에 홍조를 띄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 가데스가 손수건을 깔아준 바위위에 앉았다. 가데스는 부끄러운듯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르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주.......많이 닮았어. 조그맣고 날카로운 콧날이랑, 긴 속눈썹이랑, 핏빛처럼 빨간 입술이랑..........하지만.........' "저어........." 마르타가 고개를 숙인채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로서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꿈같은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차마 다가설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가슴 설레게 했던 사람과 이 순간을 같이 한다는 것은......... 이 말을 한다면 꿈을 깨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꿈이 깨기 전에 말하고 싶었다.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는 마르타의 가슴은 쉴 새 없이 뛰고 있었다. "말.....안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꼭 말하고 싶어요. 이 순간이.....너무 꿈같아서, 꿈이 깨기전에 꼭..... 참.....많이도 생각했었어요. 오늘 아침에 뭘 드셨을까......추운데 감기는 안 드셨을까...... 혹시 지금 검을 닦고 계실까....... 밤에 추운데 이불은 잘 덮고 주무실까...... 항상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많이 생각했었어요. 생각하면 너무 아파서 울기도 많이 울었고요, 그리고..... 너무 좋아했어요.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기가 너무 힘들어서 지금에서야 겨우 꺼낼만큼 많이 좋아했어요. 지금도......지난 시간들 생각하면.......많이 아프고........눈물나고........그래요. " 맑은 목소리로 애절하게....그렇게 말을 마친 마르타는 가만히 가데스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아무런 표정없이 땅만 응시하고 있었다. 무표정의 얼음같은 눈동자는 가데스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만드는 방어막처럼 차갑게 땅만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죄송해요.......하지만............그냥 '싫어요' 라고, 이렇게라도 한 마디만 해 주세요. 그냥...저 포기할 수 있게요." 간신히 쥐어짜내고 있는 마르타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울음기가 배어나고 있었다. 가능한 낮게 울음이 섞이지 않게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목에서 터져나오려는 울음은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떨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말 없는 가데스의 모습은 마르타의 눈에 눈물이 가득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난........." 영원만큼이라고 느낄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가데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르타는 어느 새 손으로 입을 꾹 막으며 가데스를 올려다 보았다. 가데스는 천천히 고개를 마르타 쪽으로 돌렸다. "노력할께요. 지금 당장은 사랑할 수 없어도...마르타 양을 사랑하도록 노력해볼께요. 아주 조금만.......내가 마음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흑~~~!" 어느 새 터져나오는 울음은 손으로는 막을 수 없을만큼의 흐느낌이 되어 마르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빠아~~~그래서 말야 가데스가 나한테 이 꽃 따다줬어." 자랑스럽게 가데스가 꺽어다줬다는 꽃을 내보이는 마르타의 모습에 체이스는 싱긋 웃어주었다. "나 이거 집에 갈 때 가지고 돌아갈래." 마르타는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꽃을 체이스가 읽다가 탁자에 놓아둔 책 사이에 꽂았다. "참~그리고 오늘 가데스가 나 저녁식사에 초대했어." "그래? 너무 늦지는 않게 돌아와라." 체이스가 긴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올려 묶으며 건성으로 대답하자 마르타는 뚱한 표정이 되어서 살금살금 다가와 체이스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우왓! 마..........윽..타. 수.......숨막혀........" "오빠~~~~~오빠도 같이 가는 거야~" 켁켁거리고 있는 그의 귓가에 마르타가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흘려넣었다. "뭐어?" "가데스가 오빠도 같이 오라고 했다고. 같이 가줄꺼지?" "내가 왜? 난 안가! 오늘 선생님이랑 둘만 식사하기로 했다고." 체이스가 딱 잘라 말하자 마르타는 실실 웃으며 종잇장을 펄럭였다. "사실 공식적인 초대자는 황태자 전하인데도?" "뭐?" 체이스는 놀라서 얼른 마르타가 흔들고 있는 종이를 낚아채어 읽었다. "이건....." 황태자의 약혼식이었다. 가데스의 여동생과 황태자의 약혼식. 장소는 클라리드 가의 저택. "나 이거 참~" 체이스의 목소리에는 모처럼만의 하먼과의 저녁시간을 망쳤다는 낭패감이 역력히 배어있었다. 황태자의 약혼식을 그의 스승인 하먼이 빠질 리 없으니 당연히 자신도 가야할 일이었다. "나를 직접 초대했다고? 그 녀석이?" 마르타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녀석이라니! 오빠! 그 사람 오빠보다 나이많은 사람이야." "그래봤자 한 살이잖아. 뭘 그리 따져!" "쳇! 알았어 알았다구. 갈꺼지?" "가야지. 뭐 대귀족 가데스 클라리드 님이 초청해 주셨는데 내가 어찌 안 가고 배기겠냐." "오빠. 비꼬지 말라니까!"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랑스럽기만 하던 콧소리 섞인 마르타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짜증스럽게 체이스의 심기를 긁어왔다. 약혼식 발표는 금새 끝났다. 가데스의 동생이라는 그 여자(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는 어쩐지 가데스와는 전혀 닮지 않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한 소녀였다. 자그마한 그녀에 비해 황태자는 건장한 체구의 쾌활해보이는 체이스 동년배의 소년이었다. 체이스도 한 두 번 만난 적이 있는 황태자는 4, 5년 전에 봤을 때보다 부쩍 키가 자랐고(-_-; 키 작은 자의 설움이여~) 체격도 훨씬 남자다워져 있었다. "오빠. 재미없게 여기서 술만 마시고 있을꺼야?" 마르타가 눈에 웃음을 담고 다가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눈부신 은발머리의 가데스가 서 있었다.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는거지. 체이스?" 체이스는 속으로 혼자 꿍시렁거렸다. 생각같아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언제부터 마음대로 반말을 하는거야? 내가 니 친구라도 되나요?' 그리고 체이스는 어지간해서는 속에 있는 말을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마음대로 반말을 하는거야? 내가 니 친구라도 되나요?" 순식간에 마르타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체이스를 노려보았지만 체이스는 무시하고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죽을맛인 마르타와는 달리 가데스는 재미있다는 듯 입가를 살짝 올리고 웃음을 지었다. "내가 반말하는게 마음에 안 드나보지? 그럼 자네도 반말하지 그래?" "원하신다면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죠." 가데스는 피식 웃었다. "좋아. 그럼 황태자 전하가 자네와 나를 부르시는데 같이 가는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못 할 거 없죠." 체이스는 약간은 걸음을 비척이며 '탕' 소리가 나게 잔을 시종이 들고있던 쟁반에 내려놓은 후, 보무도 당당하게 황태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가데스의 팔에 의지해서 어찌어찌 무슨 방에 들어간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테이블을 빙 둘러싸고 앉은 한 무리의 남자들이 있었다. 체이스는 머리를 휘휘 저어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어찔어질 한 것이 아무래도 평소의 주량보다 많이 마시기는 마셨나보다. "자.....그럼 다들 제 의견에 찬성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 황태자가 입가에 조소 비슷한 미소를 띄우고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주의의 의견을 묻는 듯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게 뭔 상황이여?' 머릿속으로 물음표가 무수히 지나갔지만 누군가에게 질문을 할 정신상태도 아니었거니와 그럴 기운도 없었기에 체이스는 묵묵히 앉아있었다. 술기운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힘들었다. "그럼 모두 찬성하시는 걸로 듣죠." 황태자의 목소리도 아득했다. "깼어?" 어디선가....이것과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이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 살며시 눈을 뜨면....... 가데스가 평소의 얼음장같은 느낌과는 다른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꿈처럼 가라앉는 낮은 목소리로 편안하게 속삭이고 있는 이 상황이.... "......!" 체이스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자신은 폭신한 침대위에 누워 잠이 들어있었고 가데스는 침대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반쯤은 잠에 취한 듯 이완되어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서...... 약간은 헝클어진 은빛머리카락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할 때는 새파래지는, 그러나 지금은 녹아들듯한 하늘색을 띄고 있는 눈동자를 스쳐가고 있었다. 가데스가 등지고 있는 아침의 눈부신 햇살이 그의 은색 머리카락에 부딪혀 산산히 부서지며 찬란히 빛났다. "아....저 내가......." "술 잘 못하나봐? 그런데 왜 그렇게 마셨어?" ".............." 가데스는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러워지는지. 내가 이렇게 부드럽게 대해야 할 사람은 마르타인데, 왜 마르타가 아닌 체이스 앞에서 목소리가 편안해지는 걸까. 체이스는......마리안이 아닌데도........... 체이스가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여긴 분명히 자신의 방은 아니고........단조로운 가구들뿐이지만 방안 가득 편안한 하얀 방....... 체이스의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가데스가 입을 열었다. "술에 많이 취했길래 그냥 내 방에 재웠어. 마르타에게 내 방에 재운다고 말해놨으니까 걱정마." "아......그래요....." 가데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의 체이스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에 새어나왔다. "쿡!" "..........?" "술에 많이 취했기는 했었나보군. 나랑 말 놓기로 한 거 생각안나? 왜 자꾸 존대말이지?" ".........." 솔직히 하나도 생각 안 났다. 가데스와 뭐라고 말했던 것 같기는 한데, 그 내용도 생각 안 났고 무슨 방에서 황태자가 어떤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생각 안 났다. 하지만 이렇게 비웃는 표정으로(그게 아닌데.....-_-)자신을 보고 웃는 가데스를 보자 괜한 오기가 생겨버렸다. "당연히 생각나...지! 난 그냥 익숙치가 않아서 그러는 거라고." "아~알았어, 그럼 이제부터 진짜 말 놓기로 하는 거야."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난 이제 갈꺼야." 가데스는 체이스의 모습을 보자 박장대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분명히 하나도 생각 안 나는게 뻔한 모습인데도 우기는 모습이 꼭 5살먹은 어린아이 같았다. 검술대련할 때의 그 냉철한 모습은 어디로 사라져버린거지? 저런 상태라면 황태자가 했던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구만. "그럼 이번달 말일에 전하와 했던 약속도 지키라고." 가데스는 나가려고 외투를 걸치는 체이스의 등에 대고 말했다. 순간 체이스는 멈칫했다. '약속? 무슨 약속?' 하지만 이제 와서 그걸 물어보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_- "아.알았어. 알았다구." "그럼 이달 말일에 정오까지 우리집으로 오는 것도 잊지마." 체이스가 생각이 안 날까봐 확인절차까지 해주는 친절한(?--사악한?) 가데스였다. 체이스는 입술을 꽉 깨물고 방을 나갔다. '쾅!!!!' 문이 부서질 듯 세차게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가데스는 참았던 웃음을 한꺼번에 터뜨려버렸다. "푸흡~~~~하하하하하하하~" 아주 오래간만에 그렇게 시원스럽게 웃어보는 거였다. 평소에 그렇게도 냉철하기 짝이없는 녀석이 술 때문에 저렇게 어린애처럼 변할 수도 있는 거로군. 앞으로 종종 술 좀 많이 먹여야겠는데? "으으으으으!!!!!!!!" 돌아오는 마차안에서 체이스는 미친 듯이 머리를 휘저으며 머리카락을 다 뽑을 듯 움켜쥐고 차라리 손톱을 다 물어뜯어 자살하고 싶은(그.....그게 모냐...)쪽팔림에 신음했다. 그 자식앞에서......그 자식앞에서........그럼 엉망으로 망가진 모습을 했었단 말이지? 내가....... 이건 다 마르타 때문이야. 게다가 그 약속이라는 건 도대체 뭐냐구! "아아아아악!!!!!!!!내가 두 번 다시 술을 입에 대면 사람이 아니다." "저어기.......다 왔는데요." 마부는 실성한 듯한 체이스의 모습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생각같아서는 미친(?) 체이스를 놔두고 멀리 달아나고 싶었지만 의무감에 어쩔 수 없이 말을 하는 마부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 어.....어? 어....그래." 체이스는 번개처럼 빠르게 머리를 가라앉히고(?) 마차에서 내렸다. 머릿속으로는 마르타를 잡아 족칠 생각 때문에 마부의 얼굴이 넋이 빠져있는 표정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체이스는 얼른 하먼의 저택 2층에 있는 마르타의 방으로 향했다. '벌컥' "마르타!!" "어? 오빠. 생각보다 빨리 왔네?" 돌풍을 일으키며 달려온 자신에게 태연스레 말하는 마르타를 보며 체이스는 입에 문 게거품에 파묻혀 익사하고 싶은 기분이었다.(좀 평범하게 죽을 수는 없는 걸까? -_-) "마..마르타 너......어떻게.......이 하나밖에 없는 오빠를 그 악의 소굴(?)에 버려두고 간 주제에 그렇게 태연하게 있을 수 있는거냐? 응?" "악의 소굴이라니!!!거긴 장래 오빠의 처/남/이 될 사람의 집이라구!" 순간 체이스는 열이 확 올랐다. "그래! 넌 나보다 그 자식이 더 좋겠지. 그래서 술에 취해서 내가 무슨 추태를 부리던 말던 그 자식 체면만 세워주면 그걸로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쁘겠지. 미안하다! 내가 너의 깊은 속을 몰랐구나." 마르타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버린 체이스는 들어올 때처럼 문을 쾅 닫아버리고 나가버렸다. 자신이 화가 난 이유는 담지 마르타가 그 녀석에게 너무 신경을 쓰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마르타의 말속에 들어있었던 다른 단어 때문에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는 것은 꿈에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체이스가 술에 취해서 추태를 부린 줄 알고 아직까지 화를 내고 있다고?" "네...오빠가 나한테 이렇게 화를 낸 적이 없었는데......아직까지 화를 안 푸니까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고........내가 너무 잘못한 것 같아요. 오빠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앞에서 헛점을 보이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었는데." ".........." 마르타의 말에 가데스는 속으로 '앗!'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체이스가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았었구나. 자신을 보고 화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체이스를 보고 일주일이나 지난 일 가지고 아직까지 화가 난 것은 설마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이 오산이었나 보다. 강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만큼 강한 자존심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살아온 사람에게는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가데스는 커다란 체격에는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몸짓으로 자리를 털고 있어났다. "알았어. 마르타. 내가 체이스의 기분을 풀어보도록 할게." 자신의 말에 미소를 짓는 마르타를 보면서..........가데스는 마르타의 머리색깔이 금발이었더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체이스처럼......... 말을 마친 가데스는 마르타를 데려다주러, 그리고 체이스를 만나러 하먼의 저택으로 향했다. "아마 오빠는 도서관이 아니면 뒤뜰에 있을 거에요. 항상 책을 읽지 않으면 검술 연습을 하니까." 가데스는 마르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뒤뜰로 향했다. 어쩐지 도서관보다는............지금은 뒤뜰에서 검을 휘두르며 화를 풀고 있을 것 같았다. "하앗!!!" 자그마한 체구에 황금을 자아내어 뽑은 것 같은 긴 금발머리가 검광과 함께 반짝거리며 날렸다. "후우~~~~~이제 그만하자구 체이스." 훤칠한 키의 청년이 작은 체구의 체이스의 검을 가볍게 피하며 밝게 말했다. "알았어. 나도 이제 지치는군. 그만하자고." 체이스는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체이스와 대련하고 있던 청년은 체이스에게로 다가가 가볍게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정말 체이스 넌 대단하다니까. 어디서 그런 솜씨가 나오는 건지 궁금해. 역시 선생님이 총애하는 제자는 다른건가? 응?" 청년이 웃음을 흘리며 체이스의 볼을 잡아당기는 모습이 가데스의 눈에 각인되었다. 멀어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기분이 나쁘다던 체이스가 환하게 웃고있는 모습을 보자 어쩐지 속았다는 기분과 함께 화가 났다. "빌어먹을.." 자신도 모르게 낮은 욕설을 내뱉고 가데스는 그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체이스. 나 좀 보지." 웃으며 고개를 돌린 체이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뭐야. " "나랑 얘기 좀 하자." 둘 사이에 흐르는 싸늘한 냉류를 느꼈는지 청년은 체이스의 어깨에 올려놓았던 팔을 슬그머니 내렸다. "음.....내가 자리를.....좀 피할까? 체이스?" "그래주면 고맙겠군." 체이스가 아닌 가데스의 입에서 청년을 향한 싸늘한 말이 나왔다. "아니. 그럴 필요없어. 난 할 말 없으니까." 체이스는 가데스를 무시하고 청년의 팔을 잡아끌었다. "기다려!" 가데스가 체이스의 팔을 확 잡아끌었다. 체이스의 몸이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체이스를 무시하고 가데스는 청년을 향해 말했다. "부탁인데 좀 피해주지 그래." "아.........." 말만 부탁이지 실상 칼만 들고있으면 두말 할 것 없이 협박조인 가데스의 어조에 청년은 경직된 표정으로 사라졌다. "이 손 놔!" 체이스는 그 특유의 높은 목소리로 가데스를 향해 소리질렀다. "얘기 좀 하자고." "싫어. 난 너 같이 잘난 놈이랑 할 말 없어. 부탁이니까 이 손 좀 놔주지 그래? 가서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이랑 둘이 손이라도 잡고 놀라고. 왜? 아무리 마리안이랑 닮았어도 마리안이랑 달리 귀족이라 함부로 손을 못 대니까 그 애로는 만족을 못하겠어?" '쫙!' 체이스의 얼굴이 돌아갈 정도로 격하게 가데스의 손이 날아왔다. 체이스는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꽉 깨물고 고개가 돌아간 상태 그대로 가만히 서있었다. "너를......내가 잘못봤나보다." 가데스는 그 말만을 남긴 채 체이스를 남겨두고 사라졌다.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 시간은 마치 수직으로 떨어지는 화살과도 같은 속도로 다가오는 것. 가고 싶지 않다라고 골백번도 더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어느 새 그 달 말일은 다가오고 말았다. 솔직히 황태자와의 약속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뒤에서 욕을 하던말던 안 가고 싶었다. 하지만 황태자와의 약속을 깬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부담을 안고있는 일인지는 체이스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더군다나 그 놈이 옆에서 황태자를 부추기기라도 한다면............ 여기까지 생각이 났을 때 체이스는 치를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 자식........가데스 클라리드......그렇게 돌아간 이후 마르타와 만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혹시라도........마르타를 통해서 자기를 괴롭히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체이스는 가데스의 저택으로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마르타의 방문앞에 멈춰섰다. "음!" 노크를 하기전에 먼저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마르타가 이 소리를 먼저 듣고 나와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가데스가 그렇게 돌아가 버린 이후로 마르타와의 사이도 껄끄러워졌던 차라 먼저 말을 걸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방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마르타.....자니? 나 들어간다." 그래도 방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체이스는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마르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그제야 침대에 엎드려 있던 마르타는 힘없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입을 열 기운조차 없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체이스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르타! 너 도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이야! 나한테 시위라도 하겠다는 거야?!!!" 체이스가 어깨를 붙잡고 흔들자 또다시 마르타의 눈에서 소리없이 눈물이 흘렀다. "오빠........제발 부탁이야......" ".........마르타.....너......" "제발 부탁이니까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해줘. 나......그 사람 없으면 이제 못 살 거 같아." 마르타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그러나 절실하게 말을 하는 동안에도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 있지.......그 사람 못 보고는 이제 정말 못 살꺼야. 그러니까....오빠. 미안하지만 오빠가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해줘. 응?" "..........." 체이스는 마르타의 비쩍 마른 몸을 꽉 끌어안았다. 체이스의 목으로 느껴지는 마르타의 눈물이 체이스의 가슴을 아리게 하고 있었다. "나.....정말 사랑하나봐. 오빠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나.....다 알고 있는데.....그런데도, 오빠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을지 다 알고 있는데도 나 그 사람이 보고싶어서 죽을 것만 같아. " "마르타....." "오빠....나 너무 못됐지? 그치? 응? 나 용서하지마. 나 너무 나쁜 애니까........" "미안하다 마르타." "오빠......." 체이스는 마르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미안해 마르타. 나도 너에 대한 생각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내 자존심만 생각했어. 내가 가서 사과할게. 이제...제발 그만 울어." "오빠........흑....." 마르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체이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체이스는 마르타가 잠들때까지 마르타를 끌어안은 채 다독이고 있었다. "늦지는 않았군." 가데스의 집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도 체이스는 내내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느려터져서 짜증이 났던 마차가 오늘은 너무 빨라서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어떻게 사과를 하지.........' 생각 같아서는 자신의 따귀를 때린 그 놈을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을 테지만(....이놈은 식인종이었단 말인가.....-_-)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저 모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성격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사과할지를 더 고민할 새도 없이 클라리드 가의 저택은 눈앞에 도착해버렸다. 집사의 안내에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연신 머릿속에서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는 단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이 방입니다."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와 있을까? 취해서 어렴풋한 기억밖에는 없엇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기억은 난다. 체이스는 조심스레 소리가 안 나게 문을 열었다. 다행히 방 안에는 가데스 혼자밖에 없었다. '다행이야.' 체이스는 고개를 숙인채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가데스의 옆으로 다가갔다. ".........왔군." 체이스가 가까이 다가갈때까지 모르고 있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든 가데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체이스는 무심함 어조에 한동안 죽어있던 성질이 되살아 나는 걸 느꼈다. '뭐야...이 놈은......내가 그렇게 고민을 하고 마르타는 다 죽어갈 지경이었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그게 다야?' 체이스가 꽉 쥔 주먹에 힘을 주며 참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가데스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할 말이 있어." 간신히 분을 삭인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가데스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체이스는 가데스가 자신을 바라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 자식아!!! 좀 쳐다보면 눈알이 빠지냐?!!!!!!" 체이스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가데스의 멱살을 잡았다. 어찌보면 앉아있는 가데스의 위에 올라탄 자세였지만 그런 생각따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체이스에게는 먼나라 얘기였다. "뭐야.....너 나랑 할 말 없다면서." 무미건조했다. 마치 지나가는 취객이 시비를 걸었을 때 '너 따위하고 상대하느니 차라리 지나가는 강아지랑 놀겠다' 라며 무시를 할 때나 쓰는 그런 어조였다. 그래..내가 그렇게 말했었지....... "미....미안해......" 체이스는 가데스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으며 들릴 듯 말 듯하게 말했다. 순간 가데스의 얼굴에 확연히 보일 정도의 당황의 표정이 나타났다. "뭐...지금 뭐라고?" "....미안해! 미안하다구!!!" 체이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데스의 얼굴에 어느 새 보일 듯 말 듯한 화색이 돌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하~~이거..내 귀를 믿어야 하나? 천하의 체이스가 나한테 지금 미안하다고 한 거 맞아?" 체이스는 죽일 듯이 가데스를 노려보았다. "그래. 미안해. 그러니까 이제 제발 마르타 좀 만나 줘." 체이스가 그 말을 내뱉자, 가데스의 얼굴은 체이스에게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급속도로 굳어졌다. "........하....하...하......그래. 그렇겠지.....니가 진심으로 나한테 미안한 마음을 가질리는 없었겠지." "뭐.....윽!" 가데스가 벌떡 일어나더니 체이스의 멱살을 잡아버렸다. "그래. 알았어. 너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 너의 사/과/. 고맙게 받아들이지. 그리고....." 가데스의 눈에서는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체이스는 이 상황에 대한 불평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한채 마른침만 삼켜야 했다. "두 번 다시 이런 얘기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체이스 군. 너와 이런 상황하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불쾌하니까." 말을 마친 가데스는 체이스의 몸을 던지듯이 의자에 밀쳐버렸다. "켁켁~" 체이스는 숨통이 막혔다가 갑자기 트인 느낌에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체이스를 놓은 가데스는 이제 누가 말이라도 걸면 때려죽일 듯한 얼굴로 앞만 보고 있었다. 덕분에 체이스는 끝까지 그 '약속'이라는 것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황태자와 기타의 사람들이 도착하고 일행들이 모두 출발할 때까지도 몰랐다. 그 때 술이 어지간히 취하기는 취했었나보다. 꽤 많은 숫자라고 생각했는데 통틀어서 모인 사람의 숫자는 황태자를 포함해서 6명이었다. (술이 죄지. 그래두 난 술이 좋아. 효효-가즈키) 선두에는 황태자와 함께 가데스가 섰다. 어디로 가는 건지도 모르고 그저 묵묵히 말등에 앉아서 따라가기만 하던 체이스는 자신과 함께 행렬의 맨 뒤에서 말을 타고 가는 이름모를 남자(사실은 그 때, 다 자기 소개들을 했는데 체이스는 기억 못하고 있다.) 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저어기....." "응? 왜 체이스." 허걱! 이 놈 독심술사인가 보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_-;;;바보) 이런 생각과 함께 저 놈이 왜 반말이야 라는 생각을 같이 하며 체이스도 반말로 말했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거야?" 남자는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너......진심이냐?" "응?...........으응......." 체이스는 살인적인 쪽팔림에 몸부림쳤지만 그래도 모르고 계속 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하긴..너 그 때 많이 취해있기는 했지." '정말....나 이젠 술 끊는다.' 남자는 갑자기 체이스 쪽으로 몸을 숙였다. 앉은키가 훨씬 컸으니까 속삭이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헤덴으로 가는 거야." "뭐!!!!!!!" 체이스의 외침에 앞에서 가던 남자들 모두가 일제히 돌아봤고, 또다시 체이스는 쪽팔림에 말갈기에 목을 매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여기서 잠깐..........작가의 배경설정 설명입니다.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곳은 '시드리아' 라고 하는 나라입니다. 시드리아는 크로닐 대륙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로서 라크, 헤덴이라는 나라와 함께 대륙의 3대 강국입니다. 주변에는 여러 개의 소국들이 자리잡고 있지만 이 3대 강국의 입지는 그런 작은 나라들에 비해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헤덴이라는 나라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답니다. 사신왕래도 거부하고, 3국회의에도 불참하는 일이 많아서 시드리아와 라크에서는 뭔가 궁리를 하려던 참이었죠. 여기서 황태자는 한 나라의 주인이 될 입장으로서 몇몇 실력있는 사람들과 함께 헤덴을 정찰해 보려는 의도로 길을 떠나게 된 것이었답니다. 그리고 시드리아의 수도인 곳은 '미드시드'라는 이름의 도시로서 보통 수도가 국경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반면, 이 미드시드는 헤덴과의 국경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답니다. 말타고 슬슬 가면 3일 정도 걸릴 거리죠. 이상 작가 설명 끄읕~~~ '뭐야...그럼 하루 이틀 걸릴 일이 아니었잖아. 어쩐지 저 놈들은 복장이 저렇게 철저하더라니.....' 체이스는 혀를 차며 자신의 복장을 내려다 보았다. 가볍게 소풍이나 가는 길에 어울릴 듯한 셔츠와 조끼, 그리고 얇은 바지. '돈이야 있으니까 옷은 사면 그만이지만.......얘기도 못하고 나왔는데 선생님이랑 마르타가 뭐라고 생각할까.' 하먼보다는 다 죽어갈 것 같던 마르타가 걱정이었다. '뭐...저녁 때 쯤은 여관에 들어갈 테니까 사람 하나 사서 부탁하면 되겠지.' 속으로 한숨을 내쉰 체이스는 행렬의 맨 앞에서 무언가를 속삭이며 가고있는 황태자와 가데스를 바라보았다. 딱 보기에는 황태자보다는 가데스가 황태자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넓은 어깨, 당당해 보이는 뒷모습. '여자라면.........누구나 저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겠지?' 마르타도 저 사람의 저런 당당한 모습에 반했었을 것이다. '어쩌면.....난 저 사람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아마 나의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겠지......' 그의 넓은 어깨가 주는 믿음감은 ...미움마저도 희석시켜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어느 순간 가데스가 죽일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싹 사라지고 말았다. '역시 저 놈은 좋아할 수가 없다니까. -_-+++' "오늘은 여기까지만 가는 게 어떤가?" 황태자는 국경 근처의 작은 마을에 이르자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들 늦은 밤까지 이어진 여행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황태자는 씨익 웃으며 가데스를 보고 말했다. "자네가 여관 좀 잡아주고, 간단한 지시사항들 좀 얘기해 주게." "예. 전하." 황태자는 가데스의 말에 정색을 했다. "이제부터는 전하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는 내 이름으로 부르라고. 그리고 존대말도 사양이야." "아.....응. 시프리안." 조금은 떨떠름하게 가데스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황태자는 일행쪽으로 말을 돌렸다. "자네들도 명심하게. 이제부터 우리는 여행나온 친구 사이인거고, 내 호칭말고 이름으로 부르는 거야." 동의의 뜻으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마을로 여관을 잡으러 갔던 가데스가 돌아오고 일행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방이 세 개 밖에 없어?" "네...........응. 마침 방이 남는 여관은 거기 한 군데밖에 없었어. 뭐 굳이 독방을 쓰겠다면 다른 여관을 잡아도 상관은 없겠지만 이왕이면 같이 묵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황태자-시프리안은 가데스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둘이서 한 방을 쓰는거야. 다들 알았지?" '후우~제대로 쉬지도 못하겠구만.' 혼자서 자는 것이 습관인 체이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럼 난 누구랑 같이 방을 쓰란 말야? "그냥 내가 가데스랑 같은 방을 쓰지 뭐. 나머지는 그냥 지금 같이 서 있는 사람끼리 쓰는거야. 알았지?" 시프리안은 자기 할 말을 마치자 선두에서 말을 출발시켰다. 아무도 시프리안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일행은 여관으로 향했다. '그럼 난 이 이름모를 남자(아직도 이름을 모른다......-_-)랑 같이 자야겠군.' 체이스는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대충 벗어놓고 침대에 몸을 날렸다. "나 화장실 좀 갔다올게. 불 끄지 말고 있어." "아....응." 이름모를 남자가(제발 이름 좀 물어봐!!!) 문밖으로 사라지자 조용해진 방에서 체이스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턱대고 다른 나라의 국경을 넘는 건.....게다가 일국의 황태자가 비공식적인 국경침범을 한다는 건 발각되면 좋은 전쟁의 구실일텐데........ 아무리 무모해도 그렇지 이렇게 막가는 황태자라면 나라가 걱정스러운데? 그보다는.....국경검문소에서는 무슨 핑계를 대고 통과할 생각인 거지? 하긴 이런 정도의 인원이라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그냥 여행간다고 하거나 친척집에 놀러간다고 해도 무난히 통과시켜 주겠지. 그런데 정찰은 어떤 방식으로 하려는 거지?' '딸깍~' 한참을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름모를 남자(............-_-)인가 보군'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문쪽으로 돌린 체이스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뭐....뭐야. 너." "........." 가데스는 체이스가 놀라던 말던 쳐다보지도 않고 반대쪽 침대로 가서 누워버렸다. "뭐냐니까!! 니 방은 여기가 아니잖아." 톤이 높은 체이스의 목소리에 가데스가 화가 난 듯한 눈으로 체이스를 흘깃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가 마르셀(오오오!!!!!드뎌 나왔다. 이름모를 남자의 이름!)과 하실 말씀이 있다고 방 좀 바꿔달라셨어. 됐어?!" ".......아........그..그래?" "그래. 나 피곤하니까 잠이나 자. 시끄럽게 하지말고." "......그래........" 가데스의 가세에 눌려 체이스는 찍 소리도 못하고 이불 속에 파고들어갔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가데스는 체이스에게 일체 말을 걸지 않고 다른 일행에게는 더없이 상냥하게 행동함으로써 체이스에 대한 자신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치사스럽게 보여줘왔다. (하지만 가데스가 평소와 다르게 친절하게 대하자 다른 일행들은 그게 더 불편했다. -_-;;) 따라서 체이스는 가데스와 같은 방에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울만큼 불편했다. 곧 반대편 침대에서는 가데스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편안하게 잠든 가데스와는 달리 체이스는 침대에 몸을 눕히기는 했지만 이 상황이 너무나 불편해서 잠이 쉬 올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불편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제대로 사과할 껄.......이게 뭐야, 잠도 제대로 못 자겠잖아.마르타한테 말도 전해야 하는데 그것도 못하고. 씨이........' 그러나 밤새 잠을 못 잘 것 같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이불 속에 머리를 넣자마자 잠은 쏟아져서 체이스를 덮어왔다. '쌕쌕~' 금방 어린아이같은 체이스의 숨소리가 조용히 방 안에 채워졌다. "후~" 체이스의 숨소리가 방안에 퍼지기 시작하고 한참 후, 잠든 것 같았던 가데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거칠게 머리를 휘저었다. 새근거리는 체이스의 숨소리가 묘하게 신경을 긁어와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바퀴 돌고나 와야겠군." 가데스는 산책이나 하고 오려는 생각에 옷을 대충 꿰어입었다. "으음~" 가데스의 손이 손잡이로 향하려는 순간, 꿈이라도 꾸는지 체이스가 몸을 뒤척였다. 가데스는 손잡이를 잡으려던 손을 멈추고 체이스의 침대로 다가갔다. 발길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가고 있었다. 약간은 중성적인 부드러운 얼굴선이 십대 후반의 남자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아니야......."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가데스의 손은 어느 틈엔가 자신도 모르게 체이스의 부드러운 얼굴선을 쓰다듬고 있었다. 마르타의 얼굴선은 이렇게 매혹적이지 않았어......... 그의 손은 어느 새 실같이 가느다란 황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렇게 눈부시지 않았어........ 그리고 그의 손이 향한 곳은 체이스가 따듯한 숨을 토하고 있는 붉은 입술. 그녀의 입술은 이렇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그녀의 입술은 체이스의 입술처럼 달콤하지 않을꺼야................ 닿으면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꺼야.... 달콤하게 녹아내릴 듯한 체이스의 입술이 따뜻하게 느껴져왔다. "너 요즘 이상한 거 알아?" "응?" 시프리안은 약간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띄고 시선은 앞에다 고정시킨 채로 계속 말을 이었다. 새벽같이 여관을 나와서 길을 떠난 참이라 일행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시프리안은 뭐가 재미있는지 연신 웃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가데스 너 답지 않아." "뭐...뭐가 말야." 가데스는 자신도 느낄 정도로 말을 더듬고 있었다. '이런...........내가 왜 이러는 거야.' "뭐랄까......사랑에 빠진 소년같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시프리안의 시선이 순간 찌르듯이 가데스를 향했다. "무......무슨 소리야. 내가 사랑은 무슨........." 한심스러울 정도였다. 당황하고 있다는 걸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으면서 말만 더듬고 있으면 그 말을 그대로 시인하는 것이 아닌가. 전혀 평소같지 않은 가데스의 모습에 세프리안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쿡쿡.....가데스가 이렇게 약점을 노출시키는군. 난 가데스라는 인간은 약점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야. 아~~~즐거워. 드디어 나도 가데스를 놀려먹을 구실을 잡았다~" "시....시프리안." 가데스는 혹여라도 시프리안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들릴까봐 주위를 빠르게 두리번거렸다. "푸하하하하~~~~"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가데스의 모습에 시프리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시프리안!!!" 가데스는 얼른 시프리안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당황하며 오버하는 모습이 오히려 일행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아~알았어. 알았다고." 시프리안은 여전히 입가에는 웃음을 가득 담은 채 가데스의 손을 밀어냈다.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게. 됐지?" 그래도 가데스는 시프리안의 표정이 못 미더웠다. 시프리안은 은근슬쩍 가데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마르셀이랑 방을 바꿔서 달라고 까지 해서 체이스랑 단 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응?" "시프리안....제발......." "아~ 알았어. 하지만 내 생각이 틀림없는 건 맞지? 너의 하트를 뺏어간 사람이 그 소문도 무성한 마르타라는 아가씨가 아니라 저기 맨 뒤에서 백마를 타고 따라오고 있는 금발의 조그만 청년이라는 건 말야." "............." 가데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묵묵히 앞만 보고 있는 가데스를 보며 시프리안은 체이스를 돌아봤다. 지금 가데스의 이런 행동은 무언의 긍정. '하긴.......저 녀석이 여자였더라면..........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눈독 들일만하게 생기긴 했군. 정말 예뻐. 나라도 반하겠는걸...........'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체이스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던 시프리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하......." 체이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프리안을 바라봤다. "풋......." 시프리안은 다시 한 번 웃으며 다시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켰다. '저 어설프게 웃는 모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럽군. 정말 달려가서 콱 깨물어주고 싶은데? 가데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겠어.' 자신이 도마위에 오른 생선꼴이라는 것도 모른 채 체이스는 마르셀과 재미없는 이야기만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 얘기를 나누던 중 마르셀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체이스." "응?" "너 가데스랑 많이 친한가 보더라." ".......?!!!!!!뭔 소리여!!! 내가 친하긴 누구랑 친해! 저 자식이랑?" 낮은 목소리로 발악하는 체이스의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마르셀은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어젯밤에 가데스가 너랑 할 얘기 있다고 나보고 방을 바꾸자고 했었다고. 덕분에 난 황태자 전하랑 할 말이 없어서 얼마나 어색했는지 알아?" "뭐?............하지만 어제는 분명히.........." 가데스는 분명히 황태자가 마르셀과 할 말이 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는 것은 .......... '가데스가 나한테 거짓말을? 하지만 왜...........' 체이스의 의문 가득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지 모르는 가데스는 불만스러운 어조로 시프리안을 불렀다. "딴 소리하지말고, 시프리안..." "응?" 얼굴 가득 불만이 차 있는 가데스를 시프리안은 얼굴 가득 유쾌함을 담고 돌아보았다. "우리가 헤덴에 도착하면 어떤 경로로 여행을 할지는 생각해 본거야?" "그거야......너의 담당 아닌가? 항상 생각하는 건 니몫이었잖아." "시프리안......제발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아~~~미안 미안. 하지만 난 지금 체이스가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바빠서 말이야~~~" "너어........." 가데스는 시프리안의 팔뚝으로 시프리안의 목을 꽈~~악 졸랐다.(슬램덩크에서 고릴라가 백호한테 하는 필살 목조르기 생각하세요. ^^) "케엑~~~가데.........." 평소였더라면 불경죄에 해당할 일이었지만 어차피 지금은 신분을 감추고 여행을 하고 있던 중인지라 가데스는 이런 불경스러운 짓을 마음껏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일행들은 그 뒤에서 이 광경을 보며 감히 황태자에게 이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가데스에 대한 공포를 새삼 느끼고 있었다. (가데스...공포의 마왕인가....) 슬슬 가면 3일은 걸릴 거리였지만 좀 무리해서 강행군을 한 터라 저녁 무렵에는 헤덴과의 국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국경은 어찌어찌 핑계를 대고 잘 통과할 수 있었다. 국경을 무사히 통과하자 곧 숲길이 이어졌다. 헤덴과의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터라 내심 국경통과 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는데 단순한 기우였었나 보다. 그게 아니면 헤덴 국경 경비대의 직무태만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하지만...뭔가 이상하다..........' 냉정을 되찾은 가데스의 얼음같은 눈동자가 질문하듯 시프리안에게 향했다. 아까부터 계속되고 있는 숲길. 하지만 이 길의 공기는 뭔가 다른 숲과는 다른............ 시프리안도 뭔가 주변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있었는지 아침까지의 장난스러운 표정은 감춘 채였다. "시프리안......너도........느끼냐?" "물론. 나도 멋으로 19년 동안 수련을 한 건 아니니까." 가데스와 시프리안 뿐이 아니라 일행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지금 숲 속에서 뭔가의 시선이 있다는 것은. "그렇다면 아까 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시켜준 국경 수비대 녀석들도....." "지금 우리를 보고 있는 녀석들과 한 패라는 소리겠군. 안 그래?!!!!" 시프리안은 마지막 말을 숲속으로 던지듯 소리높여 말했다. 그 말이 신호가 된 듯 숲 속에서는 복면을 한 남자들의 무리가 일제히 뛰어나왔다. 대략 10여명 정도 되는 인원이었다. 시프리안은 그들을 보며 겁도 안 나는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이런......이거 어디서부터 미행을 당하고 있었던 거지? 응? 너희들 언제부터 우리 뒤를 밟은 거냐?" 하지만 남자들은 칼을 꼬나들고 덤벼들 자세만 취할 뿐 대답해 줄 용의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흐음.....가데스. 이 사람들 아무래도 우리를 덮칠 생각인 모양인데?" "그렇군." 가데스 또한 시프리안 못지않게 여유로운 표정으로 칼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가데스가 손을 허리춤으로 내리자 남자들의 움직임이 경직되어갔다. "잠깐만..가데스." "응?" 시프리안의 눈이 순간 날카루워지며 가데스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가데스는 시프리안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냥 튀어!!!!!!!!!!" 시프리안이 번개처럼 소리치고 말을 출발시키자 일행은 당황할 틈도없이 말허리를 찼다. "이히이이이잉~~~~" 숲 한가운데의 길에서 말 울음소리가 소리높여 울려왔고, 당황한 일행보다 더 당황한 복면 남자들이 정신을 차릴 때쯤 일행은 벌써 말을 가지지 않은 복면남자들이 따라잡기에는 너무 멀리 달려가 버린 뒤였다. "하아~~~하아~~~" 가데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시프리안을 노려봤다. "시프리안.........하아~~~~달아나다니......... 그런 놈들따위 금방 처치할 수 있었잖아!!!" 흥분하고 있는 가데스를 시프리안은 냉정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은 정말 너 답지 않군. 넌 몸보다는 머리를 쓰는 녀석이었어. 생각해보라고. 여기까지 와서 싸움이 나면 우리한테 득이 될 건 하나도 없어. 왜? 어떤 놈한테 눈이 머니까 이제 머리까지 안 돌아가는 거냐?" "!!!!" 가데스는 경악하고 말았다. 사실이었다. 평소같았으면 가데스가 먼저 나서서 도망을 쳤을 거다. 하지만 지금 가데스의 머리는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시프리안은 그런 가데스의 마음을 아주 정확하게 꼬집어 내고 있었다.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체이스는 순간 순간 놀라고 있었다. 가데스가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저 황태자.....보기만큼 놀고만 있는 사람은 아니군. 바로 그 때, 시프리안이 체이스를 바라보았으니 체이스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엑!" 시프리안은 조금도 머뭇거림없이 체이스에게 다가왔다. "체이스.......이제 우리가 헤덴을 돌아다니려면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겠는데?" "네.......아..아니..뭐가 말이야?" 씨이익~~~~~ 겨울잠 자다 막 깬 뱀이 눈 앞에 아~~~주 맛있는 먹이가 떡하니 놓여져 있을 때나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사악하기 짝이 없는 미소가 시프리안의 입가에 떠올랐다. "시....싫어어어!!!!!!" 처절한 체이스의 절규가 숲속에서 울려퍼졌다. 수풀밖에서 다른 두 명과 함께 망을 보던 마르셀은 끔찍스럽게 울리는 육탄전 소리에 중얼거리며 기도를 올리기에 바빴다. 한참이 지나서야 수풀 속에서는 체이스가 양손을 가데스와 시프리안에게 잡힌 채, 머리를 곱게 땋고, 치/마/를 풀썩이며 나타났다. "이게 뭐야!!!!!!난 시드리아로 돌아갈래." 체이스는 발악했지만 위협스런 목소리로 시프리안이 한마디 하자 조용히 할 수 밖에 없었다. "명령이야. 체이스 마세르다." 체이스에게 막중한 임무(?)를 부여하고 일행은 한밤중까지 달려서 국경에서 좀 떨어진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왜 시프리안은 여자옷까지 준비해 온 걸까......-_-) "그러니까.........난 시집가기가 싫어서 어렸을 때 친하게 지내던 호위기사들을 데리고 낯선 도시까지 도망온 아가씨?" 짓눌리고 불만 가득한 어조의 체이스의 목소리에 시프리안은 참다참다 참을 수가 없어서 의자에 인형처럼 앉아있는 체이스에게 다가가 체이스를 꽉 끌어안았다. "어엇! 시프리안...이......." "아~ 체이스. 정말 너 여자애였더라면 좋을 뻔했다. 어쩌면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는 거지? 응?" 양 갈래로 곱게 땋은 체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프리안의 눈이 가데스를 향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키고 있는 가데스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녀석 봐라~' 자신과 시선이 마주친 가데스가 어색하게 얼른 눈을 돌리자 시프리안은 체이스의 이마에 '쪽~'소리가 나게 입맞춤을 했다. "시프리안!!" "쿡쿡~ 미안 체이스. 하지만 너무 맛있어 보여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시프리안은 자신의 품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체이스를 더욱 꽉 안고 체이스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덜컹' 가데스가 앉았던 의자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쓰러져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아.......저 난 좀 나갔다 올게." 가데스가 눈썹이 휘날리게 밖으로 사라지자 그제서야 시프리안은 체이스를 놓아주었다. "뭐......밤이 깊었으니 우리 이제 모두 자도록 할까?" 체이스는 시프리안에게 짓눌려(?) 엉망이 된 옷을 대충 정리하고 원망어린 시선으로 시프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럼..........나는 오늘은 독방 주는 거지?" "왜? 나랑 같은 방 쓰고 싶어서 그래?" "크어어어억~~~~~@#$%^&*+/~∞※§~" "농담이야 농담~" 체이스가 거의 개거품을 물고 기절하려 하자 시프리안은 다시 체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한편 체이스의 마음 속에서는......... '그냥 없애!!!여태까지 너한테 저렇게 굴고 무사했던 놈은 없어!' '안돼 황태자라고. 나중에 니가 사형을 당할지도 몰라.' '그렇다고 저런 놈을 살려둘꺼야?' '그냥 봐 줘. 꼴은 저래도 니가 지금 해꼬지 한다면 돌아가서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고.' '그럼 여기 있는 놈들 다 없애는 거야. 어때?' '넌 다른 놈들한테는 몰라도 가데스한테는 못 이겨. 그냥 황태자 놈(?)을 봐 줘!' 이렇게 악마와 천사(얘네들도 악마와 천사라고 할 수 있을까? ^^;)가 싸우고 있었다. "시프리안.....안 자는 거 다 알아." "왜 불러?"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건데?" "뭘 말이야? 난 가데스 니가 하는 말이 오히려 이해가 안가는데?" "..............됐다. 잠이나 자라." 적막이 감싸고 있는 어두운 방에서 가데스는 애써 시프리안에게 한 대 날리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하고 있었다. '가데스 녀석.......' 그 반대쪽 침대에서는 시프리안이 자는 척 하면서 가데스가 뒤척이는 소리를 다 들으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체이스라는 녀석이 그렇게 좋을까? 하긴...정말 귀엽기는 귀엽더군. 임자만 없다면 내가 먹고싶을 만큼. 훗...' (슬슬 이 넘의 변태성이 드러나는군.....-_-;;;;;) 아침이 밝아오고 일행은 헤덴의 수도로 떠날 채비를 차렸다. 그리고 아침일찍 마을에서 구입한 용품들로 체이스는 더욱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휘유~~~체이스. 너 정말 예쁘다." 체이스가 말등에 '옆으로' 다소곳이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마르셀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물론 체이스가 씹어먹을 듯이 자신을 째려보자 그 감탄사는 저 멀리 치워둬야 했지만...... 하지만 일행 모두가 말은 안 했지만 체이스의 모습에 거의 넋을 잃고 있었다. 긴 금발은 곱게 빗어 머리 위에는 흰 색과 하늘색이 조합된 긴 챙 모자를 쓰고 옷은 모자에 어울리는 흰 원피스에 하늘색 허리띠를 두른 것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긴 원피스는 체이스를 한결 청순한 아가씨로 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하강천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힐끔힐끔 자신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을 느낀 체이스는 나중에 불경죄로 사형을 당하던 말던 지금 당장 자신을 이 꼴로 만들라고 명령을 내린 저 앞에 가는 황태자 놈의 주둥이를 찢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체이스와는 또 다른 면에서 가데스는 시프리안이 원망스러웠다. '다른 놈들이 다 쳐다보잖아. 원래도 예쁜 놈을 저렇게 예쁘게 꾸며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귀가 어지간히 가려웠는지 시프리안은 피가 나도록 귀를 긁어야 했다. 이렇게 한 놈은 귀를 긁어가며, 두 놈은 그 한 놈을 원망하며, 나머지 세 놈은 원망하는 두 놈중 한 놈에게 넋을 잃어가며 6명의 청년들은 헤덴의 수도인 아스로드로 향했다. 지루했던 3일간이 흘러 어느 새 일행은 수도에 도착했다.(쓰기 귀찮아서 중간과정 다 생략. 효효효~게으르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가즈키) 가뜩이나 여자옷을 입고 있어서 몸도 불편한데 세 사람의 선망어린 시선과 한 사람의 장난(시프리안)과 한 사람의 처절한 무시(가데스)속에서 더욱 불편해야만 했다. 여행이라는 것은 말로 듣는 것과 직접 하는 것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어서 특별한 사건도 없이 지속되는 며칠간의 여행은 하는 사람을 미치도록 심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강요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지루함은 배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지루한 사람은 단연 체이스였다. 원래 여행을 하는 건지도 모르고 따라나왔으며, 여행에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가데스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야 했고, 죽기보다 하기 싫었던 여장을 다시 해야만 했으니..... 하지만 일행중에 이런 체이스의 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 증거로.... "저어기....시프리안. 나 이제 여장 안해도 되지않아?" "어!!!저기 좀 봐라~저것 봐 저거. 신기하지 않아?" 체이스의 말에 시프리안은 말을 돌리려고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딴청을 피우고 있고, "마르셀. 나 이런 모습 어색하지 않니?" "아니야. 아니야. 정말 예뻐. 난 세상에서 너만큼 예쁜 애는 본 적이 없다고." 마르셀은 체이스의 속도 모른채 자기 딴에는 칭찬한다고 난리를 치고 있으며, "저어기.......가데스......" "뭐야!!!!" 가데스는 말 걸기가 무섭게 소리를 버럭 지르기 바빴으며, ".............." ".............." 나머지 두 사람은 체이스를 보고 입에서 떨어지는 침을 추스리기도 바빴다. '그래.....내가 차라리 앓느니 죽지........' 체이스는 포기하기로 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시프리안은 시드리아로 돌아갈 때까지 여장을 푸는 걸 허락할 것 같지 않았다. 자기가 여장하고 있는 걸 놀리는 것이 아주 즐거운 듯 보였다. 헤덴의 수도인 아스로드는 강국의 수도인 만큼 번화한 도시였다. 시끌벅적하지만 나름대로운 치안체계나 질서는 철저한 것 같았다. '여기서 도대체 뭘 정찰하겠다는 거야.' 체이스는 회의적이었다. 대로변은 목청좋은 상인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웠지만 다툼의 소리는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다. 눈에 띌 듯 안 띌 듯 대로변 한 구석에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는 경비대원들의 모습이나 번잡해 보여도 쓰레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의 모습은 이 아스로드라는 도시가 얼마나 질서정연한 도시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곳에서 정보를, 그것도 국가기밀을 캐보겠다고? 이렇게 질서정연한 모습이라면 일반시민들은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터럭만큼도 모르는 것이 분명한데? 체이스가 의구심을 담은 눈으로 시프리안을 바라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속에 담겨져 있는 여유있는 모습이라니...... 체이스는 한숨을 푹 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도 내가 생각하는 만큼 바보는 아닌 것 같으니 한 번 믿어보지 뭐. 설마 일국의 주인이 될 사람이 아무 생각없이 여기까지 오겠다고 했겠어?' 일행은 일단 가장 큰 여관에 방을 잡았다. 이번에는 체이스만 독방이고 나머지는 큰 방 하나에 다 같이 들어가기로 했다. 방을 잡고나자 체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행에게 선언했다. "나 나갔다 오겠어. 저녁때까지는 돌아올 테니까 다들 기다리지 말고 있어." "어디 가는데?" "묻지 마!" 마르셀의 질문에 체이스는 소리를 빽 질러버리고 서둘러 여관을 나왔다. 지금 입고 있는 속옷끈이 끊어질 것처럼 달랑거려서 새로 자기한테 맞는 속옷을 사야겠다는 말을 쪽팔려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_-........ 간신히 속옷가게에서 쪽팔림을 무릅쓰고 속옷을 사서 가게 안에서 어찌어찌 옷을 꿰어입은 체이스는 저녁때까지 좀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자 이렇게 헤덴으로 오는 기회가 흔치 않은 것일텐데도 여태까지 제대로 여행을 못했다는 억울한 마음이 불현듯 들었다. '여자로서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잠깐 나 좀 볼래요?" 생각에 빠져있던 체이스의 길을 갑자기 한 남자가 막아섰다. "에.....?" 언뜻 보기에도 가데스만큼은 되는 장신에다가 냉소적인 느낌을 주는 이지적인 이모의 긴 검은머리 남자............ "무슨.....일이시죠?" 어쩐지 혼자 나오기를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시하는게 상책이야.' 체이스는 아무 말 없이 남자의 옆을 비켜가려 했다. "아...잠깐만...." 남자의 팔이 스쳐가려는 체이스의 허리를 휘감아 왔다. "이.....이게 무슨....." 갑작스런 신체접촉에 놀란 체이스가 책망하는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아...미안해요." 남자는 얼른 체이스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었다. "미안해요. 잠깐 아가씨랑 얘기 좀 하고 싶었어요." "..........." 혼자 나오기를 정말 잘못했다. 가데스처럼 이런 모습을 보고 꼬이는 놈팽이가 또 있을 줄이야.(누가....놈팽이라고? -_-+++ -가데스) "난 댁이랑 할 말이 없는 것 같네요. 제 일행들이 기다릴 꺼에요. 그럼 이만.........읏!" 체이스가 차갑게 말하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 갑자기 남자는 체이스의 팔을 확 잡아끌어 체이스의 작은 몸을 끌어안아버렸다. "이......이게 무슨 짓이야!!! 얼른 놓지 못해?" "아....미안해요. 하지만 난 그냥 얘기를 좀 하고 싶었던 것 뿐인데 아가씨가 자꾸 피하니까 안달이 나서 그래요." "이거 놔!!!!" 체이스는 발버둥을 쳤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시 보기만큼이나 힘도 만만치 않았다. 체이스가 '그래. 이 참에 쌓였던 스트레스나 풀자. 이 놈을 찔러버리는 거야!!!!' 라는 비장한(?)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실행하려는 찰나......... "그 손 놓지 못해?!!!!!!!" 귀에 익은,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남자를 위협하듯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남자의 가슴에 꽉 안겨있는 상태인 체이스는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늘한 기운이 서려있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가데스............' 남자는 갑작스런 불청객의 등장에 놀라지도 않았는지 체이스를 그대로 끌어안은 채 가데스를 바라보았다. 가데스는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남자를 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어서 놔.........여기서 나한테 죽고 싶지 않으면." 남자는 가데스를 약올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체이스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 주며 말했다. "뭐야...이 아가씨 애인이라도 되는 거야?" 덕분에 그 안에 갇힌 체이스는 압사할 지경이었다. '케에엑.........사람 살.......크윽.......' '퍽!!!!!' 어느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체이스가 자신을 감싸안은 남자의 팔이 느슨해진다고 느껴지자마자 가데스의 강한 팔이 체이스를 잡아 끌었다. 체이스는 정신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가데스에게 팔을 잡힌 채 골목길을 질질 끌려가야 했다. "자...잠깐만 가데스.........가데스!!!!!" 한참을 불러도 반응없이 묵묵히 걸어가기만 하던 가데스는 체이스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그제야 딱 멈춰섰다. "뭐야............" "............아.....저 그러니까....." 가데스가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말하자 갑자기 체이스는 할 말이 궁색해졌다. "아.....파...팔 좀 놔달라고." 아직까지도 자신의 손목을 끊어놓을 듯 꽉 잡고 있는 가데스의 손을 잡혀있지 않은 왼손으로 가리키며 체이스가 쫄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가데스는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체이스의 손목을 부서져라 움켜쥔(^^; 너......너무 격한가?) 상태로 요지부동이었다. "가데.........." '쾅!!!!!!' 가데스가 갑자기 체이스를 벽으로 확 밀었다. 덕분에 체이스는 머리를 벽에 부딪혀서 눈물이 찔끔 나고 말았다. (불쌍해라. 체이스....) "아.....저...저기......"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어......어?" "길거리에서 그런 놈팽이한테 붙들려서 희롱(?)이나 당하고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이냐고!!!!" "잠깐만 내 말 좀....." "우리가 지금 이런 곳에서 시간 낭비나 하고 있을 여유나 있는 줄 알아? 우리 위치를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알아들어? 왜 이렇게 바보처럼 행동을 하고 있는거야!! 네가 해야할 일을 생각하라고!!"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체이스가 바보같아서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체이스의 몸에 다른 누군가가 손을 대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 놈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서 화가 난 거였다.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체이스를 보자 화가 난 거였다. 사실은........ 다른 누군가가 체이스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였다. 이렇게까지 한 사람 때문에 어리석어질 수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난 거였다....... 사실은............. 체이스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자신에게 화가 났을 뿐....... 이렇게까지 한 사람에게 맹목적인 감정을 지니게 된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었을 뿐....... 실상은 다른 이유 때문에 폭발한 거였지만, 화난 이유가 자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는 가데스를 보자 체이스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퍼억!!!!!' 체이스는 가데스의 턱을 향해 작지만 매운 강펀치를 날려버렸다. 가데스는 순간적인 공격에 턱이 돌아갈 정도의 충격을 받고 말았다. "조용히 해 이 자식아!!!!!" 체이스는 자신의 주먹 때문에 대 여섯발짝은 뒤로 물러난 가데스를 보고 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 소리를 질러버렸다. "내가 이런 데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착각하지마! 나도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다고!!! 난 지금 내가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왜 이런 꼴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단 말야!!" 발악하듯 화를 내는 체이스의 모습에 가데스는 얼이 빠져 버렸다. 아........그래.....그래....저 녀석이라고 나한테 그렇게 무시를 당하고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았겠지. 더구나 저 녀석은 여행을 떠날 때까지는 여행의 목적조차 모르고 있던 놈이니까. 이렇게 여장까지 하고 낯선 나라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겠지. 갑자기 가데스는 소리를 다 지르고 분을 삭이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체이스가 측은해졌다. 힘..들었겠지...어쩌면 나보다........ 가데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체이스의 머리로 향했다. 체이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라고 지금의 솔직한 심정을 얘기한다면 조금은 체이스와의 관계가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 뜻대로만 된다면 번뇌하는 인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가데스의 손이 체이스의 머리와 한 뼘 정도 남아있는 거리에서.......갑자기 체이스가 머리를 번쩍 쳐들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마르타만 아니었으면 난 너같은 자식 상대도 안했어!!! 너같은 자식 꼴도 보기 싫다고!!! 당장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아니 그것까진 바라지도 않으니까 영영 내 눈앞에 보이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난 너같은 놈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싫다고!!" "....................." 말을 마친 체이스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며 땅을 응시했다. 가데스는 살며시 손을 거두고 벽에 기대어 있는 체이스를 놓아둔 채 여관으로 돌아왔다. "가데스. 밥 안 먹어?" "체이스. 좀 나와 봐." 아무것도 모르는 일행은 다른 시간에 나가서 다른 시간에 들어온 두 사람이 똑같은 짓을 하자 답답한 가슴만 두드릴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둘이 똑같이 무슨 짓이야!!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마르셀이 체이스의 방문을 두드리며 안에다 대고 소리질렀다. 방안에서 체이스는 침대에 엎드려서 금색의 실같은 부드러운 머리카락만 손가락에 휘감았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옆에서 죽이겠다고 칼을 들이대도 지금은 꼼짝하기가 싫었다. 그저.......아무생각없이 딱 3일정도만 이렇게 죽은 듯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할 뿐...... "가데스.....문 열어라......" 한편 가데스의 방문 앞에서 시프리안이 단조로운, 그러나 고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가데스 역시 체이스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명령이다. 문 열어 가데스." 한참을 문밖에서 서있던 시프리안이 딱 잘라 말했다. '삐이걱' 시프리안이 그렇게 말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가데스가 문을 열었다. 살며시 열린 방문을 보고 시프리안은 먼저 한숨을 내쉰 뒤 방으로 들어갔다. "뭐야......." 가데스가 세상 살기 귀찮다는 듯한 태도로 의자에 걸터앉아서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시프리안을 올려다 보았다. "너야말로 뭐야. 단식투쟁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투쟁은 무슨........한다고 해도 거들떠도 안 볼 인간도 있는데........" "이 미친 자식!!!" 시프리안이 가데스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런 격한 행동에도 가데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왜......내가 멱살을 잡힐만큼 잘못한 일이라도 있어? 왜 이러는 거야?" "니 자식이 너무 바보같아서 그래!!!!" 시프리안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가데스를 흔들어댔다. "왜! 그 자식이 너보고 싫다던? 남자가 남자 좋아한다니까 더럽대?" "...............아니.......그런 게 아니고....그냥 내가 세상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싫다네........난 그 자식이 좋아 죽겠는데 그 자식은 재가 싫어 죽겠대. 그럼 내가 죽어줘야 되는 것 아닐까?" 자기 할 말만 하고 마치 시체처럼 축 쳐진 가데스를 보자 견딜 수 없이 울화가 치민 시프리안은 가데스를 던지듯이 팽개쳐버리고 계단이 무너져라 이층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뭐야...이거........시프리안이잖아." "........넌........." 여관 일층인 식당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누군가를 보자 경직되고 말았다. "나...이런...." 시프리안은 어색하게 머리를 갈퀴손으로 매만졌다. 조금은 과장된 듯한 손짓이 긴장을 억지로 감추려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쿡....시프리안이 당황하는 모습을 다 보는군. 이건 아주 귀한 볼거리인데?" 시프리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만약 입장이 바뀐다면 너도 나처럼 당황할꺼다." "하긴........지금 니 심정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지. 하지만 말야 시프리안." 남자는 긴 검은머리를 쓸어넘기며 거만한 몸짓으로 다리를 꼬았다. "내가 너였더라면 이런 무모한 시도따위 하지않아." 시프리안은 애써 시선을 마주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에 맞닥뜨리자 온 몸의 세포들이 스물거리는 느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여기서 진다면 이대로 끝이다. "뭘 원하는 거냐. 세이리어스......." 세이리어스라 불린 남자는 눈에 익살스런 표정을 담고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들어 흔들었다. "흐음~~난 그 이름으로 불리기를 싫어한다고 했잖아? 내 애칭으로 불러달라고. 시릴~~" "......난 시릴이라고 불리는 건 싫어. 세리스." "아~~알았어. 알았다고. 언제 이렇게 시프리안이 딱딱한 사람으로 바뀌었지? 조금 서운한데? 어렸을 적 우정이 날아가 버린 것 같아서."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던 시프리안의 얼굴이 세이리어스의 장난스런 말에 점점 굳어져갔다. "기분 좋아보이는데 미안하지만 세이리어스......난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순간 세이리어스의 얼굴이 가면을 벗은 듯 순식간에 바뀌었다. 장난스런 표정은 날아가고 한순간 사형집행자의 표정이라고 불러도 좋을듯한 얼굴로....... "왜. 항상 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는데 나한테 허를 찔리니까 기분이 더럽나?" "........부인하지 않겠어." 세이리어스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시프리안에게 다가왔다. "훗~ 산다는 건 참 좋은 일이야. 하잘 것 없는 이 몸이 시프리안을 이길 때가 다 오다니 말야." "세이리어스.....부탁인데 용건만 말해." 세이리어스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의자에 몸을 기댄채, 공중에 붕 뜬 다리를 흔들었다. "뭐.....특별한 용무 같은 건 없어. 그냥 너와 너의 일행 모두를 내 집으로 초대하는 것 정도?" "어디로 가는 거야. 시프리안." "........" 가데스의 질문에 시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체이스와 가데스 때문에 다운되어있던 분위기는 시프리안의 태도 때문에 배가 되었다. 그냥 무작정 가야할 곳이 있다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던지듯이 말해놓고, 체이스에게도 아무런 다른 설명 없이 여장도 그만두라고 말하고 그 뒤로는 조개처럼 입만 다물고 있는 시프리안. 게다가 그 표정이란...... "너 항상 나한테만은 무슨 일인지 말 했었잖아. 이번 일은 나한테도 말 못할 정도로 중요한 일인 거야?" "......가데스." "응?" "호칭.......원상복귀다." 시프리안의 말에 가데스뿐만이 아니라 일행 전체의 몸이 굳어졌다. 뭔가......계획에 차질이 생겼구나...... "예..황태자 전하." "전하..여기는......." "미안하다. 내가 못나서 자네들까지 위험하게 만들어버렸어." 시프리안은 아무와도 눈은 마주치지 않은 채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헤덴의 수도 아스로드. 그 아스로드의 심장부. 왕성. "여기는 아스로드의 왕성......."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까마득한 높이의 아스로드 왕성은 타국에서도 그 견고함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지금 일행에게는 그 까마득한 높이와 견고함이라는 요소는 공포감만 줄 뿐이었다. "전하! 어떻게 된 일인지 저희도 알 권리 정도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데스는 다급한 목소리는 시프리안을 책망하듯 쏟아졌다. 시프리안은 머리를 휘저었다. "일단은 들어가지. 들어가서 설명하도록 하겠네. 하지만.......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네. 절대 자네들의 생명을 위협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꺼야." 시프리안의 단호한 어조에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일행은 도개교를 건넜다. 그럼에도 체이스는 도개교 너머로 보이는 성문이 지옥문처럼 보이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겁쟁이라고 평생 놀림을 받아야 한대도.......건너가고 싶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며, 떨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말고삐를 잡고 있는 체이스의 손에 실바람처럼 가벼운 온기가 느껴졌다. ".........." "추워보여." 그 한마디만을 하고 가데스는 크고 따뜻한 손으로 체이스의 손등을 스치듯이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는 시프리안의 뒤를 따라 두 번째로 도개교를 건너고 있었다. "그러니까......우리가 시드리아를 떠날때부터 여기서는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군요." "말하자면 그렇지. ...세이리어스 녀석한테 한 방 먹은 셈이야. 어떻게 우리나라 왕성에까지 스파이를 숨겨놓을 수 있었는지 배우고 싶은 심정이라니까." 6명의 청년들은 시종장에게 안내된 따뜻한 방에서 시프리안에게 사정 얘기를 듣고 있었다. 헤덴의 황태자, 올해 스무살인 세이리어스라는 남자........ 역시나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었는지.... "그렇다면.......우리가 국경을 쉽게 통과하게 만들어 놓은 것도, 국경근처에서 우리를 덮쳤던 놈들이 있었던 것도 다 헤덴 황태자의 생각이었다는 소리군요." "그래. 가데스. 어쩌면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도 몰라." "무슨...말씀이시죠? 전하?"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할까? 아니..... 시험이라기 보다는...... 어쨌든 '난 이렇게까지 힌트를 줬는데도 나인지를 못 맞추는 거냐?'라는 식으로 그런 짓을 했던 건지도 모르지. 훗! 한 방 먹은거야. 원래는 내가 유유히 이 나라를 둘러본 다음 녀석한테 그렇게 한 방 먹여주려는 생각이었거든." 시프리안이 설명을 하고 있는 한켠에서 체이스는 시프리안의 말은 하나도 귀담아 듣지 않은 채, 자신의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평소에도 별로 말이 없었지만 요즘 들어 특히 말수가 줄어든 그가.....그렇게 묵직하게 한마디를 던지며 스쳐지나가는 손길....... 추워보여...... 추워보여............ 추워보여................ 추워보여..................... 그 말을 듣는 순간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찡하고 울리는 느낌이었다. 지금 계절은 여름이다. 아직 한 여름은 아니지만 그래도 낮에는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날 정도로 더운 날씨인데 추울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체이스의 모습이 추워보인다고 느꼈던 걸까. 그렇게 손 위에 온기를 얹어주고 앞장서 가던 그의 넓은 등. 미움마저도 희석시킬 수 있는 믿음감을 주는 그의 넓은 등............. '가데스.........' 체이스의 시선은 어느 덧 시프리안과의 말을 다 마치고 생각에 잠겨있는 가데스에게로 향했다. 긴 은발머리가 얼굴을 반쯤 가릴만큼 흘러내려와 있었다. 가려지지 않은 날카로운 콧날과 파란 광채를 뿜고 있는 눈동자만 머리카락 뒤로 보이고 있었다. '가데스........' 일순, 가데스와 체이스 사이의 공기만이 정적에 휩싸인 듯 고요하게 느껴졌다. 가데스가 어느 덧 눈을 들어 체이스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데스는 체이스를 빨아들일듯한 강한 눈빛이 의혹의 빛을 담고 체이스를 응시했다. '왜...그런 눈빛으로 날 보는 거야. 넌...나 같은 놈 싫다고 했잖아.' 싱긋. 체이스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였지만 가데스는 그 가벼운 미소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체이스........' '딸깍' 그 때, 문이 열리고 일행은 모두 초긴장 상태로 문을 응시했다. 그리고.......... "어엇! 너는!!!!" "당신은!!!!!!" 가데스와 체이스가 동시에 외쳤다. 방을 들어서던 남자도 둘을 보고 적잖게 놀랐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들.....하~이런....." 체이스는 기가 막히다는 마음뿐이었다. 자신을 추행(?)하려고 했던 남자가 이렇게 여기서 헤덴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예복을 입고 나타날 줄이야........... 남자는 잠시 가데스와 체이스 이외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일행을 둘러보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평정을 되찾으려는 듯 헛기침을 하고 나서 시프리안을 바라보았다. "너희 일행들에게 설명은 다 한거야?" "......그래." "그렇다면 다들 짐작하겠군. 여러분. 저는 헤덴의 황태자인 '세이리어스 카탈헤나 데 힐튼'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군요." '으으으으으으으.............' 체이스는 이를 갈고 있었다. 왜 내 인생은 요즘 이 모양 이 꼴로 꼬이기만 하는거야!!!!!어째서 그 변태 놈이 헤덴의 황태자인 거냐구!!!!!!!!!!! 가데스 또한 마찾가지 심정이었다. 이렇게 우리 앞에 무사히 나타난 걸 보니 턱이 날아가지는 않은 모양이군.........허!허!허! 세이리어스는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했다. 태연한 척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들과 이런 상황에서 마주하게 되자 어지간히 당황한 듯 했다. 왜 그들이 당황하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던, 그러나 물어볼 심정도 아닌 시프리안은 불만섞인 어조로 세이리어스를 책망하듯 말했다. "부탁인데 빨리 용건만 말해주지 않겠어? 우리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지." "오우~ 처리라니. 과격한 언어 사용은 너답지 않아 시프리안." 분하지만...세이리어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언제나 세이리어스와 마주하면 여유로웠던 것은 시프리안이었다. 세이리어스는 언제나 시프리안의 장난스런 말에 발끈하기만 하던 열등감에 사로잡힌 아이였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5년 전에도 세이리어스는 키작은 꼬마였었는데.....어느 새 이렇게........... "뭐......니가 그렇게 원한다면 용건만 말하도록 하지." 세이리어스는 독촉하는 듯한 시프리안의 말투에 한결 여유로워진 표정이었다. "원래는.......이걸로 만족하려고 했어. 너한테 패배감을 안겨주는 일. 그런데........" 그의 시선이 옮겨졌다. 날아갈 듯 부드러워 보이는 금발머리에게로......... "하나만......나에게 주겠어? 딱 한가지만. 그러면 이번일 없었던 걸로 하겠어. 깨끗하게." 시드리아로 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의 몇 배의 힘이 들었다. "이 길이 아니잖아." "그럼 니가 알아서 길 찾아가!!!!" 가데스는 힘들게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마르셀에게 고함을 질러버렸다. 마르셀은 눈살을 찌푸렸다. 가데스뿐만이 아니라 일행 모두가 패닉상태였다. 시프리안도 자잘한 일에 화를 내기 바빴고.....체이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은 줄곧 말갈기에 고정한 채였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어쩌다 무슨 말이라도 걸면 화들짝 놀라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젠장맞을......이게 무슨 꼴이야.' 평소에는 얌전하던 마르셀마저 속으로 욕을 내뱉고 있었다. 헤덴의 황태자라는 놈이 그 말만 하지 않았어도 모두들 기분이 이 모양은 아니었을텐데....... '딱 하나.....체이스 마세르다를 나에게 줘.' 아니.....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뭐....지금 당장 결정하지는 마. 딱 한 달의 기간을 주겠어. 결정권은 전적으로 체이스에게 주는 거야.' 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비열한 놈......... '싫다면.........헤덴과 시드리아 둘 중에 어느 나라의 군사력이 강한지 시험해 봐야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런 말까지 덧붙일 건 뭐람. 한마디로 체이스가 한 달 후에 헤덴으로 가지 않는다면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말이 아닌가. "체이스." 시프리안이 고요하게 말발굽 소리만 울리고 있는 정적을 깼다. "....예. 황태자 전하." 시체가 일어나서 말을 한다고 해도 지금의 체이스가 하는 말보다는 사람이 하는 말 같을 것이다. "가기 싫으면 가지 마라." "가겠습니다." "가지 마." "가겠습니다." ".............벌써.......결정짓지는 마라. 한 달 남아있으니까 그 때까지 잘 생각해봐." "네." 체이스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다시 일행은 죽음같은 침묵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시드리아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뭐야. 왜 따라와?" 시드리아로 돌아와 모두 헤어진 뒤, 줄곧 자신의 뒤를 말없이 따라오고 있는 가데스를 보고 체이스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데려다 줄게." "싫어." "............." 가데스는 말없이 따라왔다.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조용히 말을 몬 두 사람은 어느 덧 하먼의 집에 도착했다. 체이스는 말에서 내려 가데스를 올려다보았다. 가데스도 체이스를 따라 말에서 내렸다. "싫다고 했어. 난 너같은 자식이 뒤에서 따라오는 거 싫어.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따라가고 싶었어." "이 자식아!!!!!!" 체이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가데스의 멱살을 잡았다. "싫어!!!싫다고!!!제발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마! 싫으니까! 난 너같은 자식 싫으니까!" 가데스의 가슴을 치며 체이스는 자신도 모를 말을 내질렀다. 아냐......싫지 않아......... 난 네가 싫은 게 아니야......오히려......... 지금 널 보면......다시 또 네가 보고싶을까봐........ 너의 넓은 등을 또 바라보고 싶을 일이 생길까봐.......... 그래서.......지금 너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운 거야. 이제 난 영원히 여기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니까........그러니까......... 사실은 네가 뒤에서 따라와 주는 소리가 들리는 게 너무나 기뻤지만...... 겉으로는 이렇게 화를 내는 척하는 날 용서해 줘......... "미안하다.........." 가데스가 나지막하게 말하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 체이스의 작은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천 명의 아이를 잃고 단 하나 남은 아이를 끌어안을 때의 어머니의 손길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있을까.... 아니면.........유리로 만든 종이가 존재한다면 그 종이를 집어올리는 손길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 있을까....... 한없이 고요하고 그 안에 빨려들어갈 것 같이 그렇게.........부드럽게.......... 어느새 체이스의 눈에서 소리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너의 모습이 다시 보고 싶을까봐 두렵다는 생각........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꼴도 보기 싫은 미운 놈이었는데.......... 왜 갑자기 너의 넓은 등이 너무나 따뜻해 보였을까.......... 왜 다시는 널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에 바늘이라도 박힌 듯한 답답함이 드는걸까........... 넌.........내 여동생과 사랑해야 할 사람인데..... 왜 내가 널 사랑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을까.............. 왜 그랬을까.......... "흑........." 체이스의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어느덧 입밖으로 흐르는 흐느낌이 되었다. "미안하다." 가데스는 체이스의 얼굴을 살며시 감싸쥐고 마치 깃털이 호수위에 내려앉듯이 그렇게 부드럽게 체이스의 입술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감히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 것같이 고요한 순간이었다. '쨍그랑!' 적막한 공기를 깨는 파열음이 들려오고, 두 사람은 아쉬운 듯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마르타......." "............" 말을 잇지 못하는 마르타를 보고 두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가데스는 오히려 담담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체이스는 머리가 백지가 되는 기분이었다. 마르타는 몸을 돌려 안으로 뛰어갔다. "마르타!!!" 체이스는 마르타를 따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가데스는 뛰어가는 체이스를 향해 손을 내밀려다 미처 닿지 못한 손길에 손을 내려야만 했다. 체이스는 숨을 헐떡이며 마르타의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마르타......." 마르타는 넋이 빠진 사람처럼 침대에 몸을 걸치고 앉아있었다. 하지만 마르타의 가늘게 떨리는 손이 있는 힘을 다해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체이스는 알 수 있었다. "마르타.....미안해. 정말 미안해........." 체이스는 마르타의 옆으로 다가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정말.....미안하다........네가 본 것......다 잊어버려. 아무 일도 아니었으니까....그러니까 잊어버려." "오빠........" "응." "오빠는......그 사람 사랑하는 거야?" "...........난.........." 마르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살포시 감긴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난.....모르겠어....처음엔........죽기보다 싫었는데.....그런데 지금은............" "사랑해?" ".......난........." "사랑해?" ".............응." 마르타는 다시 눈을 떴다. 체이스의 말을 곱씹듯 입술은 꼭 다물려 있었다. "마르타......." 체이스의 목소리에 가만히 앉아있던 마르타가 체이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단순한 동작이 어찌나 어색해 보이던지.......나무를 조각해 만든 인형을 움직여도 마르타 보다는 생동감 있을 것 같았다. 생명력 없어보이는 동작만큼이나.......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는 마르타의 얼굴도 조각같았다. "오빠.......미안한데........나.......정말 미안한데......" 목이 메이는지, 아니면 흐르는 눈물이 거슬리는지 마르타는 자꾸만 말을 끊었다. 체이스는 재촉하는 기색도 없이 가만히 마르타를 바라보기만 했다. 영원히라도 대답을 기다려 줄 수 있었다. "오빠.........정말 미안한데...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들어줄게. 뭐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던지.....혹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뭐든 들어줄게." "오빠같은 거........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조금도 격해지지 않는 어조로 마르타는 마치 연극의 대사를 읊조리듯 말하고 있었다. 마치 인형극의 인형이 입만 뻐끔거리며 어설프게 말하는 것처럼...........그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부탁이야.......부탁이야. 오빠.....부탁이야........" "마르타......." "오빠......제발 부탁인데.........죽어!!!!!!죽어버려!!!!!!" 어느새 마르타의 목소리는 히스테리컬하게 높아져갔다. 체이스는 미친 듯이 소리치는 마르타에게 다가갔다. 짧은 시간에 마르타의 울음은 대성통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눈물이 많아졌니......너.....원래는 누구 앞에서 눈물 한방울이라도 흘리면 죽는 줄 아는 자존심 강한 애였잖니. 그런데......뭣 때문에 이렇게 우니...........응? 체이스는 마르타를 꼭 끌어안았다. 미동도 없이 눈물만 쏟아내고 있는 가엾은 ...........소녀. 그리고 ............ 어느덧 체이스의 눈에서도 볼을 따라 한줄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르타......그러지 말고......내가 니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줄게. 너랑....가데스랑.......두 사람이 나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갈게. 그러면 안될까? 부탁이야. 나......죽는 것보다.....너희 두 사람 눈앞에서 그냥 영원히 사라지는 걸로 하게 해 줘." 내가 헤덴으로 가지 않으면.............. 너랑 그 사람.............. 평화롭게 살 수는 없을 테니까. 내가 헤덴으로 가면............. 전쟁따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내가 가서............ 너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나도 지금보다 더 행복할 것 같으니까....... 내가 죽지 않고............... 그 곳에 가서라도 산다면......... 내가 죽어서.......... 그 사람도 나를 따라 죽게 되는 것보다........... 나도 훨씬 행복할 테니까............ '가데스에게 찾아가자.' 날이 밝자마자 체이스의 머릿속을 메우는 생각은 이것 하나 뿐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만나서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내야 한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쾡한 눈이 되어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올린 체이스는 하먼의 집을 나서 가데스의 집으로 가려했다. 아니, 갔을 것이다. 목석처럼 우뚝 서서 초췌해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가데스가 없었더라면....... 체이스는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명을 질러버릴 것 같았다. '이 바보.........밤새도록 거기에 서서..........내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거기서 그렇게 꼼짝도 하지않고 우두커니 서서?' 가데스가 다가와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을 때도 체이스는 간신히 입을 틀어막고 있을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나.......가.......데스..........." "괜찮아....아무 말 안 해도......" "가데스......."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 거야. 이렇게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을 해가지고 괜찮기는 뭐가 괜찮다는 거야. "가데스.....흑....." 사실은........ 가데스에게 이별을 고하고 싶었다. 더 이상 자신의 눈 앞에서 알짱거리며 괴롭히지 말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퍼부으려 했다. 그래서............. 그렇게라도........ 가데스를 마르타에게 가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침묵보다 고요히 자신을 안아오는 가데스의 손길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자........." 가데스가 그렇게 말했을 때도 눈물이 솓구쳐서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가데스. 그럼 거기서 밤새 꼼짝도 안 하고 있었던 거야?" 말없이 긍정의 뜻을 담아 빙그레 웃는 가데스를 보자 체이스는 가슴이 꽉 막혀왔다. "이런 바보! 잠도 안 자고 거기서 밤새 서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그래도......아침에 일어나는 네 모습을 처음 보는 사람이 나이고 싶었어." 아............ 어떻게 히면 이렇게 바보스러울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어질 수가 있을까.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한 사람에게 맹목적으로 눈 멀 수가 있을까........... 또 다시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느낀 체이스는 얼른 입을 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물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기에.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응? 그게 뭔데?" "..........비밀이야." 나지막하게 말하는 가데스의 웃음이......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그렇게 한없이 슬펐다. 특별히 무슨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자신의 등을 가데스에게 기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편안했다. "가데스........" "너랑....꼭 여기를 다시 한 번 와보고 싶었어" 빛의 호수. 체이스는 이곳을 그렇게 이름짓고 싶었다. 가데스와 맨 처음 만난 오렌 경의 영지에 있던 그 아름다운 호수........ "가데스.........." 체이스는 어찌할 수 없이 격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벅찬 마음이었다. 가데스는 아무말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 체이스를 보고 피식 웃었다. "여기...기억하니?" 왜 기억을 못 하겠어..... 바보야....왜 내가 여기를 기억 못할꺼라고 생각하는 거야. 여기는 내가 너를 처음 만난 곳인데.... "네가 나의 생명을 구해 준 곳이야..........." 말을 하던 가데스는 갑작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왜....웃는거야?"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체이스를 보자 가데스는 체이스의 이마에 얽혀있는 실같은 머리카락을 가벼운 손짓으로 쓸어내렸다. "너.....그 때 너무 예뻤었어." "와앗!!!가데스!!!!!" 체이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가 되며 가데스의 몸을 확 밀쳤다. "으아악~~~~체이스!!!!!" 체이스의 갑작스런 공격에 가데스는 균형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다. 가데스의 팔에 안겨있던 체이스도 가데스와 한 덩어리(?)가 되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와아아악!" 말에서 덜어지고도 둘은 한참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아이고오......" 체이스는 바닥에 부딪친 머리를 어루만지며 가데스를 확 째려보았다. "가데스!!! 너 때문에........어? 가데스!!!!!" 죽은 듯이 가만히 누워있는 가데스를 보자 체이스는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가.......데스? 가데스.....가데스!!!!" 체이스는 얼른 가데스의 몸을 더듬었다. "피......피는 안 나는데.....가데스....가데스? 가.....가데스. 얼른 눈 좀 떠봐. 가데스!!!" 체이스의 손길은 점점 다급해지고 있었다. 설마 머리를 부딪쳐서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설마 이대로 죽는 건....아니겠지? "으음......" 가데스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물...." "물? 물이라고?" 체이스는 가데스의 신음소리에 얼른 호숫가로 달려갔다. 그릇이 없다는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체이스는 자신의 입에 물을 머금고 가데스의 입술에 적셔갔다. 제발.......이렇게 죽지 마........ 가데스의 입술이 물기를 띄어가면서........... "읍......." 가데스의 혀가 강하게 체이스를 옭아매어 왔고, 어느새 가데스의 몸은 체이스를 밑에 두고 올라와 있었다.(즉, 체이스를 올라타고 있었다.) 당황해서 반항도 못하고 있던 체이스는 안간힘을 써서 간신히 가데스의 몸을 밀쳐내었다. "가데스!!!!!" 가데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 가득 장난스럽게 미소를 띄고 있었다. "하하하~ 체이스가 이런 일로 당황할 줄은 몰랐는 걸? 이렇게......." '퍽!!!!' "억!" 갑작스레 날아온 강펀치에 가데스는 턱이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체이스는 가데스를 한 방 날린 후 주먹을 꼭 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 바보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두 번 다시 그런 장난 치지도 마!!!" "......." 잠시 충격에 굳어있던 가데스가 몸을 돌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체이스에게 다가왔다. "체이스........이런...." 체이스의 눈에 가득 담긴 눈물을 보자 가데스는 할 말이 없었다. "체이스....체이스?" 가데스는 얼른 체이스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체이스가 발버둥을 쳤지만 가데스의 강한 팔은 그 작은 몸을 놔주지 않았다. "미안해.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 정말 미안해. 체이스...." 언제나 자신이 가라앉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낮고 편안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체이스의 눈에 담겨있던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떨어졌다. "바보야...놀랐잖아....." "미안해." "니가 죽은 줄 알고......" "미안해......" "나 때문에 너 죽은 줄 알고......" "미안....." "이렇게 두 번 다시 널 못보게 되는 줄 알고...." 못 보게 될까봐...... 비록 한 달이 지나면.... 그 다음에도 역시 널 볼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그 전에 단 한번이라도 널 더 보고 싶은데 내 실수 때문에 니가 여기서 죽기라도 하면 더 이상은 널 볼 수 없게 될 테니까. 가데스는 체이스의 살며시 내리깔린 긴 속눈썹에 입을 맞추었다.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이 가데스의 촉촉한 입술을 적셨다. "사랑해........." 첫 고백이었다 . 이제는 체이스가 너무나 좋아하는....... 과연 더 이상 이 목소리를 듣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까 의심스러울 만큼 좋아하게 되어버린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고 편안한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은 가데스의 입술을 거쳐 체이스의 귓가로 흘러왔다. "사랑해." "응......" "사랑해." "응." "사랑해. 체이스." "......응......가데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소중하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 마르타도, 헤덴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도......... 눈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가데스의 녹아내릴듯한 하늘빛 눈동자만이 체이스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 녹아내릴듯한 눈빛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나만을 사랑해라. 최면을 걸어오는 듯한 강한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자신만을 바라보라고 자신만을 원하라고 그리고....자신만을 사랑하라고........... 가데스의 팔이 살며시 체이스의 몸을 감싸왔다. 눈꺼풀에 느껴지는 그의 입술의 감촉이......꼼짝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듯 체이스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데스......" "응?" 가데스는 체이스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로 대답했다. 간지러운 울림에 체이스는 웃고 말았다. "킥~" "어? 왜 웃는거야. 내가 고백한 게 그렇게 우습게 보여?" 가데스가 정색을 하며 체이스에게 덤벼들었다. 체이스는 가데스의 표정에 움찔했지만 곧 폭소를 터뜨려버렸다. "와하하하하~~~가데스!!!!!허리는 간지럽히지 마!!" "또 웃을꺼야? 응?" "하하하...하...하......하아....항보옥~~~~~" 체이스가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 귀여운 동작에 가데스는 싱긋 웃으며 다시 체이스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하지만 또다시 그 웅얼거리는 감촉에 체이스는 웃음을 터뜨려버렸고 가데스는 또다시 체이스를 숨넘어가게 간질였다. "하지마아~~~가데스~~~" 즐거운 듯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 뒤로 눈물이 배어나고 있다는 것을........체이스와 가데스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이나 다음 순간이 올 것을 절실히 알고 있기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음 순간을 잊고 싶었다. 피를 토하리만치 처절한 마음으로............. 가데스의 팔을 베고 누운 체이스는 호숫가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반딧불이 반짝거리는 하늘은 별이 무수히 수놓인 은하수보다 더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체이스.....졸려?" ".....응...." 옛날에....가데스가 잔디밭에 누워 잠이 들어있던 자신을 한없이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는 왜 몰랐을까. 가데스의 목소리가, 그의 한없이 가라앉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렇게 꿈의 나락으로 빠지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자고 싶지 않은데...... 이젠 헤어지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잠들면 이런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텐데................ "가데스." "응?" "나 니 목소리 싫어." "........나........말......하지 말까?" "아니......" 체이스가 약간 고개를 틀어 가데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졸려서.....니 목소리 들으면 잠이 와서 들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지금 자면 넌 두 번 다시 못 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지금 듣지 않으면 또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들어야 돼. 계속말해. 내가 더 들어지기 싫을때까지 말해. 그래서.......다시는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해줘. 응?" 가데스가 체이스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영원히 내 목소리 듣게 해줄게. 그러니까 그런 생각하지마. 두 번 다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라는 바보같은 생각......" ".........."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거짓말......새빨간 거짓말......어떻게 그럴 수 있는데? 거짓말장이 가데스...... 체이스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거 알아?" 자장가처럼 아득하게 들려오는 가데스의 목소리가 더할 수 없이 따뜻했다. "한가지만...... 딱 한가지만 내가 바보 체이스한테 극비사항을 얘기해줄까? 내가 왜 마르타를 사랑할 수 없는지 알아? 모르지? 바보 체이스는 모를꺼다. 마르타는......금발머리를 휘날리며 칼을 휘두르지 못하거든. 또 마르타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나한테 큰 소리도 못 치거든. 마르타는 내가 놀려도 나한테 주먹질을 못하거든. 마르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거든. 그리고........... 마르타는 체이스가 아니거든." 가데스. 나 정말 네 말대로 바보인가보다. 그러니까 너의 말도 안 되는 우스개소리에도 이렇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가봐. 그런가봐. 나.......정말 바보인가보다. "사랑해....." 꿈결인양 한없이 멀게만 들리는 가느다랗고 높은 목소리가 들려온 듯도 했다. "체이스?" 여름이었지만 새벽의 싸늘한 한기에 눈은 저절로 떠졌다. "체이스........." 가데스는 몰랐었다. 무엇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랐기에 그런 사실을 배울 수도 없었다. 누군가가 있다가 사라진 빈자리는,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을 때는 몰랐던 공허감을 두 배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시프리안은 씩씩거리며 쳐들어오듯 자신의 방을 찾아온 가데스를 평온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어서 오게. 가데스." "황태자 전하!" 가데스는 숨을 헐떡이면서 무릎을 굽혀 시프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자네가 이렇게 흥분을 다 하다니." "전하!!!!" 가데스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 그다지 크지는 않은 목소리였으나 그의 격한 감정이 그대로 실린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어 더 크게 느껴졌다. 시프리안은 심하게 일렁이는 가데스의 눈빛을 한 번 바라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마 가데스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체이스......오늘 아침에 헤덴으로 떠났네. " 아무말도 없었다. 가데스가 자신의 멱살이라도 잡고 소리치리라 생각했는데 등 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데스를 돌아볼 용기는 시프리안에게는 없었다. "가데스. 내가 괜한 짓을 했어. 그래서..자네들한테 이런......" 말을 이을 수도 없었다. 모두가 자신의 과오로 인해 생긴 일. 이제와서 되돌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사과할 수도 없었다. 사과하기에는 그들이 너무나 아파보였다. "전하." 겨우 들려온 들릴 듯 말듯한 나지막한 목소리에 시프리안은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았다. "가데스......." 처음으로 보았다. 가데스의 얼음같은 눈동자에서 떨어지는........ 사파이어를 녹인듯한 눈물방울을............ "저도..........헤덴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붉은 빛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촛불로 밝힌 어슴푸레한 불빛이 더없이 음침하게 느껴지는 방이었다. 원래는 깨끗하게 장식된 방이었을테지만 지금 방을 채우고 있는 붉은 빛은 방을 퇴폐적으로만 보이게 하고 있었다. '딸깍' 의자에 인형처럼 앉아있던 체이스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 "아.......오랜만이군. 아니, 그리 오래간만은 아닌가?" 영원히 저렇게 여유로울 것 같은 웃음. 저 사람의 얼굴에서 저 웃음을 떠나게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체이스는 그를 외면했다. 체이스를 당황시키려는 듯 일부러 허술하게 여미고 온 옷깃이 신경에 거슬려서 세이리어스를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이런.....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군요. 명색이 일국의 황태자께서." "오호.......무슨 뜻이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는 거만함에 체이스는 약간은 굴욕감마저 느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에게 내가 받은 만큼 똑같은 굴욕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몰라서 물으시는 건가요?" "자네는......지금 내가 이런 행동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건가?" 세이리어스의 손길이 갸름하게 경사를 그리고 있는 체이스의 턱선을 따라 움직였다. 경직되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체이스는 입을 악물어야 했다. '괜찮아.......괜찮아....가데스가 나한테 이렇게 대했을때도 처음에는 싫었지만 나중에는 괜찮았잖아? 그러니까......괜찮아질꺼야.' 하지만 세이리어스가 과연 가데스와 똑같을 수 있을까. 이 사람은 가데스가 아닌데.......... "....쿡......" 세이리어스가 바싹 얼어있는 체이스의 얼굴을 보더니 흐르듯 유연한 손놀림을 멈추었다. "왜.......가데스의 손길은 이것보다 더 부드럽던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피가 날 정도로 자신의 입술을 세게 깨물면서 체이스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삭여야 했다. 그런 것이 아니다. 가데스는........그런 것이 아니다......... 세이리어스가 자신을 외면하는 체이스의 눈 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가데스는 그런 놈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눈인데?" 잘도 아는군. 그 순간.......화가 나서 차마 깨닫지 못하고 있던 어떤 한 가지 사실이 체이스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당신...어떻게......응?" 세이리어스의 긴 손가락이 말하지 말라는 듯 체이스의 입술을 막았다. 세이리어스는 체이스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알고 있는듯한 표정이었다. 의혹이 가득찬 체이스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세이리어스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말해주는 대신 나에게 뭘 해줄꺼지?" 체이스의 입술에 있던 손가락은 어느 새 황금의 실로 자아낸 긴 머리카락을 희롱하고 있었다. 어떻게 허락을 받아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가데스의 머릿속에는 얼른 체이스를 찾아와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정신없이 헤덴으로 가는 사신자격을 받아내고, 정신없이 헤덴으로 갔다. 그 과정을 누군가가 설명하라고 시킨다면 아마 한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이라고 대답해야 옳을 것이다. 헤덴으로 가기까지의 그 일주일이....... 그만큼 가데스는 절박했다. 그의 맑은 눈동자를, 빛나는 머리카락을, 가느다란 목소리를.........그리고 그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면 죽어도 좋았다. '전쟁따위.........일어나도 좋아!' 언제부터 이렇게 불충한 생각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대대로 왕가에 충성하던 유서깊은 클라리드 공작가의 장손인 가데스 클라리드가........ '체이스....체이스.....체이스.....'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단 하나, 그 단 하나 때문에 가데스는 쓰러질 수도 없었다. 그래서 헤덴의 황태자를 자신의 눈앞에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 자신만만한 표정을 마주하게 되자 가데스는 살인의 충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가데스는 그의 자신만만한 면상을 갈겨주고 싶은 마음을 오로지 한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눌러참았다. 여전히 여유로운 헤덴의 황태자 세이리어스는 습관인 듯, 길고 검은머리를 쓸어올리며 가데스가 앉아있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오늘은 시드리아의 사신 자격으로 온 거라고? 흠......." 일부러 저렇게 행동하고 있다. 세이리어스의 저런 과장된 여유로운 행동이 자신을 도발하기 위함이라는 것쯤은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도발에 넘어가면 끝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솟구치는 분노는 이성의 힘으로는 누를 수 없을만큼 끓어오르고 있었다. "흠......이게 시드리아에서 보내는 공문입니다." "어디 좀 보죠." 가벼운 조소가 세이리어스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언뜻 그의 눈은 서류를 보고 있는 듯하지만 가데스를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가데스는 세이리어스의 조소에 가까운 웃음을 보는 순간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마치 가데스를 조롱하는 듯한 웃음.......... '참자....참자.......참자.....'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는 가데스를 앞에 두고 세이리어스는 길지도 않은 공문을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읽었다. "알았어." 마침내 공문을 다 읽은(사실은 아까 다 읽었지만 일부러 읽고 또 읽은) 세이리어스는 공문을 탁자위에 내려놓았다. "잘 읽어보았다고 가서 전해주시게. 그리고 답변은 내 쪽에서 나중에 사람을 따로 보내겠다고도 전해주시겠나?" 흠칫. 가데스는 몸을 떨었다. 지금 이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자신을 효과적으로 화나게 할 수 있을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헤덴에 남고자 하는 곧바로 자신을 돌려보내겠다는 말을 함으로써 도발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본래 사신이 오면 바로 답변을 전해주지는 않더라도 며칠의 연회를 베풀어 머물게 하는 것이 관례. 그걸 모를 리 없는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전쟁의 구실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가데스에게는 이상하게도 그의 이런 말들이 가데스 자신을 화나게 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 그리고 또 한가지........ 과연 시프리안이 기억하고 있는 세이리어스의 모습이 진짜 세이리어스의 모습일까? 시프리안은 세이리어스가 5년전만 해도 열등감에 사로잡힌 키만 작은 꼬마라고 했었다. 아무리 5년의 시간이 있었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신만만하고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으로 확 바뀔 수 있는건가? 이상하다. 가데스의 표정에서 또 세이리어스는 무엇인가를 읽은 듯, 표정을 익살스럽게 바꾸었다. "피곤할테니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떠나는 것이 좋겠군. 그럼 난 이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가데스가 나가려는 세이리어스를 다급하게 불렀다. 세이리어스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서두르는 기색이 조금도 없이 몸을 돌렸다. "뭐지?" 말을 하기전에 먼저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뛸테니까. "체이스.....체이스 마세르다가 헤덴의 왕성에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음....그래? 몰랐군. 그런데?" 저 죽일 놈........ 가데스는 다시 한 번 살의를 눌렀다. "괜찮다면.......아니,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체이스를 만나보고 싶습니다." "풋......많이 보고 싶나?" "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 나왔다. '만나게 해 줄 수 없다!' 나, '지금에 와서 체이스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냐?' 라던가 기타 등등의 대답을 상상하고 있던 가데스로서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아.....저........" 갑작스런 질문에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리고 상기된 얼굴마저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때려서 상기된 얼굴이 가라앉는다면 백만대라도 더 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체이스를 뺏어간 저런 놈의 앞에서........ "왜 대답을 못하지?" '못 할거 없지' 가데스는 입술을 앙다물고 세이리어스를 직시했다. "예. 많이 보고 싶군요. 전. 하." 일부러 전하라는 말을 끊어서 발음했다. 일국의 황태자라면 너도 수치심이 있어봐라, 라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역시 가데스의 예상대로 세이리어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의 포커 페이스...... "미안하지만 지금은 만나게 해 줄 수가 없겠는데 어쩌지?" "...............만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데스의 목소리가 약간 울분이 섞여있다는 것을 세이리어스도 눈치챈 듯 했다. 그의 눈매가 약간 꿈틀하고 움직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얼굴 표정이 바뀌지는 않았다. "아....나도 그러고 싶기는 한데, 그럴 수가 없어서 말야. 사정이 좀 있거든. 좀 피곤할꺼야. 후후....."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저.....체이스가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머릿속을 채워서........그것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그리고 이거." 세이리어스가 가데스의 앞에 뭔가를 툭 던졌다. "자네가 가지고 싶어할 것 같아서 말야." 양 끝을 곱게 다듬어 리본으로 묶어놓은 빛나는 금발머리카락이었다. 또 다시 악몽에 빠져든다. 빠져나오고 싶지 않지만 빠져나온다는 결말이 정해져있는...... 또다시 시작되는 악몽은 시작되었다. 아니, 악몽은 아니다. 밝은 금발머리카락이 장난스레 자신의 얼굴을 간질이고, 그의........아름다운 얼굴이 미소를 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꿈....... 하지만 언제나 그 끝은 체이스가 서글픈 웃음을 지으며 빛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기에 가데스에게는 악몽이었다. 지난 일주일동안.......똑같은 이 꿈을 수 백번도 더 꾸었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니었다.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아서 뜬 눈으로 지세우는 가데스가 꿈을 꾼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어쩌면 꿈이 아니라 환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끝없이 가데스를 괴롭혀오던 악몽이 또다시 가데스에게 다가왔다. 기분좋게 얼굴을 간질여오는 실바람같은 부드러운 머리카락......... 살며시 뜬 눈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빛으로 만든 것 같은 체이스의 모습.......... 가데스는 기도했다. 찰나의 시간동안 무수히 기도했다. 신이여........ 제발......... 바라건데........ 이렇게 간절히 바라건데..... 이 꿈에서 깨기전에.............. 부디 저를 죽여주소서......................... 다시 눈을 감는 시간동안 그 짧은 시간동안 그렇게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가데스! 자지 말고 일어나란 말야!!!" 톤이 높은 가느다란 목소리가 가데스의 지친 몸을 이완시키고 있었다. 아아.......이대로 죽을 수만 있다면......... "안 일어나?" 체이스. 내가 죽기전까지 그렇게 계속 속삭여줘.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이래도 안 일어날래?!!!!!" "으왁!!!" 꿈과는 상관없을 것 같은 통증이 가데스의 허리에 박혀오며 (허리를 돌에 찍혔다 -_-;;) 가데스는 풀숲에 뒹굴어야 했다. "어? 얼레? 가데스 너 돌에 부딪쳤어?" 아직도 상황파악이 되지 않고 있던 가데스에게 체이스가 달려왔다. 가데스는 허리의 통증을 통해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체......이스?" "반가워." 엎어져있는 가데스를 앉은 자세로 내려다보며 체이스가 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처음 만난 빛의 호숫가에서, 또 다시 그들의 시선이 마주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야!!!" 사실 이유 따위는 어떻든 상관없었다. 영원히 체이스를 이렇게 안고 있을 수만 있다면.....하지만 이유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체이스가 어떻게 된 줄 알고 거의 죽어가던 자신을 멀쩡하게 웃으며 맞는 체이스를 보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 전에 가데스가 먼저 얘기해줘." 등을 가데스의 등에 대고 앉아있던 체이스가 편안하게 말했다. "도대체 헤덴의 왕성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던 거야?" "어.......?" 사실 가데스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세이리어스가 내민 체이스의 머리카락을 보고 이성을 잃고 칼을 뽑아들고 덤볐던 것 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 뒤로는.....그러고보니....... "이게 뭐야!!!!" "아야!! 가데스! 머리카락은 왜 잡아당겨?"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가데스에게 인상을 찌푸려주며 체이스가 가데스의 손아귀에 잡혀있던 머리카락을 잡아뺐다. 하지만 가데스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머리카락까지 질린 정도라면 엄청나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그럼 그 머리카락은 뭐야? "너....머리카락을 잘린 거 아니었어?" 가데스는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 잘리긴 왜 잘려? 그리고 내 머리 잘라다가 어디다 쓰겠다고?" "뭐야? 그 자식 변태 아냐?!!!!! 왜 엉뚱한 머리카락 가져다 놓고 나를 미치게 만드냐고!!?" "에? 설마......헤덴의 황태자님이 너한테 내 머리카락이라고 하면서 다른 머리카락을 보여주길래 흥분해서 헤덴 왕성을 뒤집어 놓은거야?" "설마가 아니라고!!!!!! 그리고 님은 무슨 님이야. 그 자식 완전히 미친 변태잖아? 어쩐지 생긴 것부터 기름독 다섯 개로 빚어놓은 것처럼 생긴걸 봤을 때 알아봤어야 했어." "푸하하하하하하하하!!!!!!!" 미친 듯이 흥분하는 가데스를 보며 체이스는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세이리어스가 미친 변태에...생긴건 기름독 다섯 개로 빚어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음...생긴 건 쫌 느끼하긴 하지. 비록 표준을 넘어서는 미남이기는 해도 말이야.......하지만 미친 변태라는 말은.......큭큭큭.... 체이스는 한참을 웃다가 간신히 눈물을 닦고 평정을 되찾았다. "그래서....넌 그 머리카락만 보고 흥분해서 헤덴의 황태자를 살해하려 했고, 그래서 마침 달려들어온 호위병들한테 머리를 맞아서 기절했다는 말이지?" 가데스는 여기까지 체이스의 말을 듣고 뭔가가 많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왜 난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지? 비록 미친 변태라지만 일국의 황태자에게 칼을 들고 덤볐는데....." 세이리어스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되겠군...쯥....미.친.변.태........ "뭐.....사정이 좀 있어." "????" 체이스는 가데스를 보며 싱긋 웃었다. 가데스의 잔뜩 찡그려진 얼굴도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래도 말 안해?" "으아아아악~~~가데스!! 제발 간지러움은 태우지 마!!!" "자! 말해!" 가데스가 숨이 넘어갈 듯한 체이스를 호숫가 풀숲에 눕히고 내려다보며 말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가데스는 누워있는 체이스를 꼼짝못하게 팔 안에 가두고 재촉했다. "얼른 말해! 말 안하면 또 간지럽힌다." "흐음!! 가데스.......비록 여기서 니가 나를 간지럼으로 죽인다고 해도 그건 말할 수가 없어." "체에이이스으!!!!!!!" 체이스는 또다시 간지러움을 태우려고 덤벼오는 가데스를 보고 경기를 했다. 그러나 체이스는 가데스를 진정시키는 방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체이스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향해 휘장처럼 드리워져있는 가데스의 긴 은발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지금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는데......." 체이스의 말에 가만히 체이스를 바라보던 가데스의 입술이 슬며시 체이스를 향해 달콤한 숨결을 내뿜으며 다가왔다. 살며시 자신의 입술을 벌려오는 가데스의 입술을 느끼며 체이스는 세이리어스와 나누었던 말을 더듬었다. "동생?" 자신의 머리카락을 희롱하던 세이리어스의 손을 밀쳐내고 체이스는 반문했다. 어떻게 가데스를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 세이리어스가 가데스의 이름을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시프리안과 함께 헤덴의 왕성에 왔을 때, 그 때 세이리어스가 이름을 물었던 사람은 체이스 뿐이었다. 다른 일행의 이름은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나의 동생이니까...... "하...하지만 어떻게......" "왜 나는 헤덴 사람이고 가데스는 시드리아 사람이냐고?" 끄덕끄덕.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이리어스는 체이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풋.......왜 가데스가 너한테 그렇게 집착하고 있는지 알겠군. 그렇게 토끼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보이는 걸?" 체이스는 발끈하는 마음을 겨우 다잡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말 돌리지 말아 주세요." "알았어. 알았다고. 하지만 그렇게 경직되어 있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난 동생의 연인을 뺏을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니라고." "누....누가 누구의 연인이라는 거에요?" 체이스의 얼굴이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화끈거려왔다. 여.....연인이라니...... "아니야? 그럼 내가 여기서 널 먹어도 가데스한테는 꺼릴 것이 없는 건가?" ".....에? 아...아니.........그런 건......" 세이리어스 앞에서도 당당하려고 마음먹었던 체이스의 마음은 어느 새 날아간 지 오래였다. 당황하는 체이스의 모습에 세이리어스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체이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내가 방에 들어올 때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응?" 쳇......그렇게 사람 마음을 콕콕 찝어서 얘기하면 사랑받고 살기 힘들다고. "다른 애기는 그만 하시고 말씀 해달란 말입니다!!!" 이제는 거의 쪽팔림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발악이었다. "알았어. 더 있다가는 체이스의 얼굴이 빨갛다 못해 까맣게 타겠군." 젠장.......넌 평생 누구랑 재미있게 연애도 못할꺼다. 세이리어스는 어느 새 진지한 얼굴로 표정을 바꾸고 체이스가 앉아있는 의자 맞은편에 앉았다. "혹시.......헤덴에 왕자가 나말고 하나 더 있었다는 걸 아나?" "예....하지만 어렸을 때 죽었다고....." "그래.......십 년 전이었지. 그 녀석이 죽었어........... 진짜 가데스 클라리드가......" 무슨 소리.....가데스가.......진짜 가데스 클라리드가 누구라고? "지금 그 말씀은!!!" 체이스의 외침은 무시하고 어느새 나지막하게 변한 목소리로 세이리어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 진짜 가데스 클라리드는 십 년도 전에 죽었어. 지금 네가 알고있는 가데스 클라리드는 원래 헤덴의 두 번째 왕자라는 소리지." "말도 안됩니다! 어떻게 일국의 왕자가 다른 나라에서, 그것도 한갓 귀족으로(한갓 귀족.....^^;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왕족에 비교해서입니다.) 자랄 수 있단 말씁이십니까?" 싱긋. 가벼운 미소가 굳어져 있던 세이리어스의 얼굴위로 스쳐지나갔다. "낭만이야. 나의 아버지이신 현 헤덴의 국왕폐하와 지금은 돌아가신 진짜 가데스의 어머니의 로맨스라고." ".......예?" "이해가 안 가나? 뭐...젊은 시절에 허락받지 못하던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이 자라서 아이를 바꿔 키우기로 했다고 한다면 이해가 가겠나? 처음부터 작정하고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었겠지. 정말 운명처럼 내 동생과 진짜 가데스가 태어난 날짜가 같았고, 그 때 마침 가데스의 어머니가 헤덴에 와 있었다는 우연이 없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테지." 아............ "그런.........." 세이리어스의 말을 다 듣고 체이스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면 가데스는.........헤덴의 두 번째 왕위 계승자......... "그래서......알고 계셨군요. 가데스의 이름을." "그래.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가데스에 관한 모든 걸. 하지만 난 시프리안과 같이 초대되어서 온 가데스를 만나기를 기대했지, 내가 반한 여자의 애인인 가데스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었다고." 다시 장난스레 돌아온 세이리어스의 말에 체이스는 다시 얼굴에 불을 켜야했다. "그......그 말씀은 안 하셨으면 좋겠군요." "풋...알았다고. 귀.여.운. 체이스." "...-_-+++++ 그런데.....그렇다면 왜 저를 이 곳으로 부르신 거죠? 저를.......하실 마음이 없으시다면....." "아......그거...... 그냥 헤덴에까지 냉정하기로 소문난 가데스가 흥분하는 꼴을 한 번 보고 싶어서 말이야. ^^(순종 새디스트.....) 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냥 가데스를 보고 싶었다고. (정말일까.....) 그리고............... 내 하트를 첫 눈에 앗아간 여인도 한 번 보고 싶었고 말이야." "저....전하!!!!" 길고 긴 입맞춤이 끊어질 듯 이어졌다. 숨이 찬 체이스는 고개를 돌려 가데스를 피했다. "가데스....잠깐만...." ".............-_-(그만두기 싫다는 표정....)" "^^; 자......잠깐만...." ".......그런데 체이스." "응?" "그럼 너 일주일동안 거기서 뭐하고 있었어?" "응? 나 헤덴에 있지 않았는걸?" "? 그럼 어디에 있었어?" "시드리아로 돌아와서 정리.....좀 했어." "뭐어어!!!!!!" "........오메야.....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너!!!!내가 죽어가고 있는 일주일동안 계속 시드리아에 있었단 말야? 정말 그런거야?" "아........저......그게....." 가데스의 모습에 체이스는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이리어스와 맹세했었는걸.....시드리아에 가게 해주는 대신 가데스가 헤덴으로 갈때까지 가데스와는 연락하지 않기로. 맹세따위 무시하면 그만일지 모른다고 생각해 버릴수도 있었지만 도저히 기사의 명예를 걸고 한 맹세를 어길 수는 없었다. 물론 기사의 명예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가데스를 만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그 전에 할 일도 있었기에 간신히 맹세를 지킬 수 있었다. "저....정리 좀 했어. 좀 봐줘. 제발...." "무슨 정리야 정리는!!!!!" ".........마르타......." 순간 가데스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렇지....마르타..... 그 동안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자신의 행동 때문에 마르타는 상처받은 존재이고, 체이스와의 관계도........ "잘.....있어?" "응." "정리 잘 했고?" "응................."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가데스는 웃고 있는 체이스의 표정을 보면서 위안을 삼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결코 자신의 사랑을 위해 동생을 희생시킬 수 있는 인물이 아님을 알기에, 체이스가 이렇게 자신의 품에서 웃고 있을 수 있다는 건 체이스의 말대로 마르타가 마음을 잘 정리해 주었을 것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던 체이스가 가데스에게 머리를 기대어왔다. 호수에서 일어난 바람이 여름의 뜨거운 공기를 담고 기대어 있는 두 사람을 스쳐갔다. 바람이 지나가면서 맞닿아 있던 은색과 금색의 긴 머리카락을 매듭짓듯이 얽히게 했다. "가데스." "응."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한 목소리였다. 처음으로.......체이스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에 장해물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 말 한마디 하기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아니, 힘들었을까가 아니라 지금도 충분히 힘들다. "사랑해..........." 체이스의 잦아들 듯이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가데스는 체이스의 금색 머리카락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체이스로부터 들어야 할 말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지금만큼은 그런 것들은 모두 다 다른 세상일들처럼 젖혀두고 있고 싶었다. 지금은 체이스를 바라보고만 있기에도 벅찬 마음을 추스리기도 모자랐다. 이렇게......... 다시 천번의 인생을 산다고 해도 만나기 어려울 것 같은 연인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눈물나도록 감동스러워서......... 그냥 체이스를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와서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가데스는 다시 한 번 집어삼키고 싶을 정도로 달콤해 보이는 체이스의 입술을 살며시 덮었다. 끊임없이 가슴에 느껴지는 작은 심장의 울림이 미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후후후후..........오늘은 결단코..............' 체이스의 달콤한 입술을 느끼며 굳은 다짐을 하는 가데스의 손길은 어느새 체이스의 셔츠 자락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에필로그 "체이스!!! 준비 아직 안 했어?" "됐어. 됐다구." 체이스는 소리를 지르며 하얀 예복을 차려입은 모습으로 방에서 나와 기다리고 있던 가데스에게 다가갔다. "가데스....나 좀 이상하지 않아?" 옷깃을 다듬으며 걱정스럽게 말하는 체에스를 보며 가데스가 피식 웃었다. "니가 결혼하냐? 왜 그렇게 걱정해?"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결혼식이잖아.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있겠어? 그리고 가데스 너도 좀 신경써야 하는 거 아냐? 제일 친한 친구의 결혼식인데? " 체이스의 말에 가데스가 의미모를 미소를 지었다. 일년이 지나도 하나도 변함없는 체이스에 비해, 더욱 남자다운 매력을 물씬 풍기는 가데스의 미소를 보자 체이스는 새삼 두근거림을 느꼈다. 가데스는 체이스의 작은 몸을끌어안 듯 뒤에서 팔로 감싸안았다. 그리고 변함없이 나지막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신경쓰이는 건 체이스......너 하나로도 족하다고." "..........." '퍽! 퍽! 퍽!' 체이스는 쓰러진 가데스를 놔두고 유유히 식장으로 걸어갔다. "오늘만큼은 자제해 줘. 우리 황태자 전하와 헤덴의 황태자 전하도 오신다고 했다고." 순간적으로 가데스의 귀가 번쩍 뜨였다. 누가 온다고? "누가 와? 그 미친 변태 자식?" (아직까지도 세이리어스와 자신과의 관계를 모르는 가데스.....) "^^; 그......그래. 얼른 가자고." "지금 내 얘긴가?" 숨어있다가 불쑥 나타나는 것처럼 갑자기 긴 검은머리의 장신의 남자가 나타났다. 세이리어스는 가데스 보란 듯이 체이스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가데스는 가기 싫은 모양인데 내가 대신 에스코트해도 될까 체이스?" "하..하.....(삐질삐질........)"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세이리어스와 함께 가는 체이스를 보면서 가데스는 분노를 폭발시켰다. "오늘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거기서!!!!!!!!"